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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노벨상의 인물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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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 만델라[Mandela, Nelson(Rohihlahla), 1918. 7. 18~]
노벨평화상 수상(1993년)

글_이병욱 / 한국테마클럽

언젠가 영국 하원의원들이 여러 역사적 인물 가운데 위대한‘영웅’을 뽑기 위해 한 표씩 행사하였다. 그런데 2위와 3위를 차지한 인물은 영국이 낳은 위인,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와 윈스턴 처칠이었던데 반해 정작 1위의 주인공은 영국인이 아닌 전 남아프리카공화국(이하‘남아공’) 대통령이었다.

악명 높은 남아공 흑백분리정책의 부당성에 맞서다 27년간이나 감옥에 갇혀 지내야 했던, 그러나‘용서와 포용’,‘ 화해와 관용’을 필두로 한 정책으로 피를 흘리지 않고 흑백 간 정권교체를 이루어 나라를 하나로 묶어낸‘용서와 화합의 상징’. 바로 넬슨 만델라이다.

남아공은 17세기 중반부터 백인의 지배를 받아 왔는데, 넬슨 만델라는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 인종분리정책)란 이름으로 무려 350년 동안이나 지속된 백인통치를 끝내고 빈곤과 질병, 무지 속에서 살아온 남아프리카의 흑인들에게 자유를 얻게 해준 사람이다.

1999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만델라는 자신의 이름을 딴 넬슨 만델라 재단을 비롯한 여러 인권기구와 빈곤퇴치운동, 그리고 어린이 대상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가해왔다.

그러나 2001년 전립선암 진단을 받은 후, 2003년부터는 공식석상에 나타나거나 현안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 눈에 띄게 줄었으며, 2004년에는 "더 이상 나를 초청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앞으로는 내 쪽에서 연락을 먼저 하는 방식이었으면 좋겠다"며 ‘은퇴’를 발표했다.

해외통신은 27년의 억울한 수감생활을 하고도 그를 감금했던 정부까지 용서한 만델라를 두고‘용서와 화합의 화신’이며‘그의 미소와 유머 감각은 소중한 국제적 상징’이라고 평가했다. 또 그의 뒤를 이은 타보 음베키대통령의 실정에 빗대, ‘만델라는 나라를 합쳐놨는데, 음베키가 다시 쪼개 놨다’며 그의 부재에 따른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타보 음베키 대통령은 2008년 9월에 사임하고 현재는 칼레마 모틀란테 대통령이 재임 중이다.)

설명 [좌]러시아 1988년, 만델라 70세 생일 기념 [우]남아공 1994년, 만델라 대통령 취임 기념
설명 [좌]남아공 1996년, 노벨 사망 100주년, 남아공 노벨상 수상자 만델라 [우]노르웨이 2001년, 노벨평화상 100주년 기념, 1993년 수상자 만델라

2008년 7월 18일, 그는 아흔 살 생일을 맞아 생일잔치를 가졌다. 그를 일컫는 존칭 '마디바'의 생일축하 행사로 축제·공연·강연회 등이 곳곳에서 열렸고, 책 출간이 잇따랐다.

영국에서 진행 중인 에이즈퇴치운동‘46664’는‘세계 최대 온라인 생일카드’를 위해 누리집(happybirthdaymandela.com)을 만들어 전 세계 누리꾼들로부터 축하 메시지를 받았는데,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부부와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 등도 인사말을 남겼다. ‘ 46664’는 수감 당시 만델라의 죄수번호다.

생일축하 누리집의 소개글은‘34살에 변호사가 돼 정치를 시작하고, 46살에 수감된 뒤 72살에 풀려나 75살에 노벨상을 탔으며, 77살에 첫 흑인대통령이 되었고, 81살에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을 만들었으며, 84살에 에이즈퇴치운동을 시작한 그가 90살이 됐다’고 만델라의 인생을 요약하였다.

만델라는 영국 BBC방송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전세계 지도자와 사상가 중에서 세계의 대통령이 되어야할 사람' 1위에 뽑혔다고 한다. 또한 대통령 퇴임 후에도 각종 협회와 대학에서 상과 학위를 받았는데, 그는 이러한 명예가 '남아공 국민들이 자신에게 준 힘'의 결과라는 점을 잊지 않고 있으며 "나는 대단한 인간이 아니다. 노력하는 노인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만델라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10대 시절에 남의 집 돼지를 몰래 잡아먹었다는 것이다. 만델라 전 대통령은 2006년 아카데미상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초치'를 만든 남아공 출신 개빈 후드 감독의 예방을 받은 자리에서 "나도 젊은 시절 '초치'의 주인공 깡패처럼 비행을 저질렀다"며, 돼지를 꾀어내 잡아먹곤 하던 일화를 공개했다.

그는 술지게미를 이용해 돼지를 유인했는데, 지게미냄새가 바람을 타고 돼지가 노는 쪽으로 퍼지도록 한뒤, 지게미를 슬금슬금 옮겨 돼지를 외진 곳으로 끌고 가서는, 친구들과 함께 잡아 통돼지구이를 해먹었다고 말했다.

만델라는 "이 나라 지도자들 중 일부는 어린 시절 갖가지 비행을 저질렀지만, 자라면서 책임 있는 사람으로 성장해 국가에 봉사했다." 며 "젊은이들이 생각대로 행동해주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을 버려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후드 감독은 "남아공을 자유국가로 만든 만델라 전대통령의 업적이 없었더라면 이 영화를 만들 수 없었을것"이라고 화답했다.

우리도 만델라처럼 따뜻한 감성을 지니고 비전과 섬김을 통해 세상에 감동을 주는 지도자를 가졌으면 좋겠다.

설명 네덜란드 2003년, 만델라 85세 생일 기념 및 만델라 어린이 재단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자 흑인인권운동가인 넬슨 만델라는 1918년 7월 18일 트란스케이 움타타에서 템부족(族) 족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1940년 포트헤어대학 재학 중 시위를 주동하다 퇴학당하고는, 전통혼례를 피해 잠시 트란스발 광산의 경찰관 생활을 한 적도 있었다. 1942년 버트바터스란트대학교에서 법률학위를 취득하고 동료인 올리버 탐보와 함께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1944년 아프리카민족회의(ANC) 청년연맹을 창설하였고 1952년 비백인(非白人)으로는 처음으로 요하네스버그에 법률상담소를 열고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정책) 반대운동에 나서는 등 본격적으로 흑인인권운동에 참가하였다. 1952년과 1956년 두 차례에 걸쳐 체포되었으며, 1956년에는 반역죄로 기소되었으나 1961년 무죄로 풀려났다. 이 기간에 부인과 이혼하고 놈자모 위니프레드(위니 만델라)와 재혼했다(이들은 1996년에 이혼했다). 1960년 3월, 샤프빌 흑인학살사건을 계기로 비폭력 평화시위운동을 중단하고 대(對) 정부 사보타주를 역설, 무장투쟁을 지도하다가 1962년 다시 체포되어 5년형을 선고받았다.

1963년 투옥 중인 만델라와 동료들이 사보타주·반역죄·공모죄로 재차 소추된, 이른바‘리보니아 재판’이 열렸다. 경찰은 요하네스버그 교외의 리보니아에 있는‘국민의 창’이라는 이름의 ANC 전투조직 본부를 급습해 막대한 물량의 무기와 장비들을 적발했다. ‘ 국민의 창’설립의 산파역을 맡았던 만델라는 기소내용의 일부를 시인했고, 1964년 6월 11일 종신형을 언도받았다

그는 1964년~1982년 케이프타운 앞바다의 로번 섬 교도소에 투옥되었고, 이어 1988년까지는 삼엄한 경비로 악명 높은 폴스무어 교도소에 감금되었는데 결핵 증세가 나타나 입원치료를 받기도 했다. 그 동안 남아프리카의 흑인과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국제사회에서 만델라의 투쟁은 하나의 위대한 지향점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9년 자와할랄네루상(賞), 1981년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 1983년 유네스코의 시몬 볼리바 국제상을 받았으며, 1990년 2월 석방 때까지 세계인권운동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마침내 1990년 2월 11일 F. W. 드 클레르크 정부는 그를 석방하기에 이르렀다. 석방된 만델라는 3월 2일 ANC의 부의장에 선출되었고, 1991년 7월에는 오랜 동료인 올리버 탐보의 뒤를 이어 의장에 선출되었다.

인종차별을 불식한 민주헌법의 제정을 위해 드 클레르크 총리와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하며 협상을 통한 평온한 사회로의 이행을 부단히 추구했으며, 그 결과 두 사람은 함께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1993년의 일이었다.

1994년 4월, 남아공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다민족 총선거에서 ANC는 승리했다. 대통령에 취임한 후 만델라는 진실과 화해위원회를 설치했다. 이 위원회는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에 일어난 인권 침해사건을 조사했다. 만델라는 또한 흑인들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주택·교육·경제개발 계획을 도입했다.

1996년, 만델라는 새로운 민주주의 헌법 제정을 지휘했다. 1997년에는 ANC 의장에서 물러났고, 1999년에 임기를 마치자 재임하지 않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으며, 같은 해 6월 정계에서 은퇴했다.

저서로 자유를 위한 투쟁 의지를 밝힌『투쟁은 나의인생-The Struggle is My Life』(1961)과『험난한 자유의 - No Easy Walk to Freedom』(1965), 『나는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 - I Am Prepared to Die』(1979)에 그의 글과 연설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1994년에는 자서전『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 - Long Walk to Freedom』을 출판했다.

만델라는 1995년과 2001년 두 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했다. 대통령 재임시절인 1995년 7월 6일, 김영삼 대통령의 초청으로 우리나라를 공식 방문한 것이 첫 번째다. 만델라 대통령은 민주화운동의 동지로서 김영삼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고, 국회에서 연설을 했다. 언론은 그의 업적을 칭송했고, 그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가 전파를 타기도 했다.

그러나 만델라의 방한이 국민적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그의 방한을 전후해서 삼풍백화점이 무너졌고, 정치권이 소용돌이쳤기 때문이다. 지방선거 후 조심스럽게 민자당의 붕괴가 점쳐졌으며, 김대중 아·태평화재단 이사장은 신당 창당 작업에 돌입했다. 이러한 정치·사회적 이슈에 묻혀서 만델라의 방한은 애초의 기대처럼 결코 요란할 수 없었다.

연초까지만 해도 만델라 대통령은 김대중 아·태평화재단 이사장의 초청으로 방한할 예정이었다. 만델라의 방한을 앞두고 자서전『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이 김대중 이사장의 아들 김홍업 씨에 의해 아태평화출판사에서 간행되었는데, 원래 만델라는 이 자서전 출판기념회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의 방한이 김영삼대통령 초청에 의한 국빈 자격 방문으로 격상되면서, 아·태평화재단이 기획했던 출판기념회 자체가 무산되고 말았다.

한국 정부와 남아공 정부의 공식 접촉에 일개 민간단체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만델라의 방한을 지켜보는 아·태평화재단 관계자들의 심정은 편치 않았다. 자신과 관련한‘양 김의 줄다리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만델라 대통령은 흐뭇한 표정으로 2박 3일의 방한 일정을 마치고 남아공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세월은 흘러 2001년 3월 10일, 만델라는 다시 한국을 방문했다. 독일, 인도 등 3개국 순방의 첫 일정으로 방한한 만델라 전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김대중대통령을 면담하고 만찬에 참석한 것이다

만델라 전 대통령은 대북 화해 협력 정책에 대한 지지와 함께 한반도에서의 평화진전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김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거듭 축하하였다. 그는 이와 함께 아프리카 분쟁해결 방안 등 국제정세에 대한 의견을 교환한 뒤 2박 3일 일정을 마치고 다음 일정을 위해 독일로 떠났다.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두 사람의 만남은 여러모로 뜻깊은 역사적인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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