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르[Tagore, Rabindranath, 1861. 5. 7~1941. 8. 7]
노벨문학상 수상(1913년)
글_이병욱 / 한국테마클럽
9월초에 우취인 김승제 씨가 한국 관련 외국 우표들을 모아『외국 우표로 본 한국의 모습(Koreana)』이라는 아담한 책을 발간하였는데, 거기에
서 힌트를 얻어 우리 한국과 관계있는 노벨상 수상자를 한번 선보이기로 하였다.
순서로 보면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마땅히 먼저 소개해야 하겠으나, 얼마 전 타계하신고인에 행여 누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여러 가지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어 생각을 접고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를 택하기로 하였다.
지난 5월 어느 날 뉴스에 타고르 이야기가 한번 있었다. 인도의‘시성(詩聖)’으로 불리는 라빈드라나트 타
고르가 어린 시절 학교에 가지 않으려고 거짓말을 자주했던 말썽꾸러기였다는 기록이 나왔다고 인도 일간지가 보도하였다. 일찍이 8세부터 시를 쓴 천재로 소문났
으며 16세 때 처녀시집을 발표해‘벵골의 셸리(영국의 낭만주의 시인)’라는 명성을 얻었던 타고르가 말썽꾸러기‘문제아’란 얘기에는 고개가 갸우뚱했다.
하지만 타고르가 다녔던 한 가톨릭계 학교가 공개한 생활기록 문서에 따르면, 그는 학교에 다니기를 무척
싫어한‘문제아’였다. 다섯 살에 입학한 타고르에 대해,‘ 부모는 학교에 계속 보내려 했지만 타고르는 온갖 속임수를 써가며 학교에서 도망치려 애썼다’고 적혀 있
었다. 함께 학교에 다닌 두 살 위의 형과 사촌이 거짓말을 하지 못하게 어르고 타일렀지만 소용이 없었으며, 타고르는 결국 4개월 만에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가
정교사로부터 따로 교육을 받아야 했다. 문서에는 또 타고르가 이 학교에 입학하기 전 다른 세 학교에서도 적응을 못해 번번이 학교를 옮겨야 했다는 기록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 8월호에 소개한 노벨평화상 수상자 넬슨 만델라 생각이 난다.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영
화「초치」의 남아공 출신 감독을 만난 자리에서“나도 젊은 시절「초치」의 주인공처럼 비행을 저질렀는데, 술지게미로 돼지를 슬금슬금 유인해서 친구들과 함께 잡아 통돼지구이를 해먹었다”고 고백한 이야기 말이다.
[좌]인도 1952. 10. 1 [중]인도 1961. 5. 7 타고르 탄생 100주년 [우]
[좌]브라질 1961. 7. 28 타고르 탄생 100주년 [우]스웨덴 1973. 12. 10 1913년 노벨상 수상자 타고르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 오히려 두 분에 대한 존경심이 더해지는 걸 보면 아마도 인간미 넘치는
진솔한 사연에 모두들 친밀감을 느끼고 공감하기 때문
일 것이다.
타고르는 인도의 시인, 사상가, 교육자로 캘커타에서
태어났다. 그는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이던 시절에 위대
한 종교지도자 데벤드라나트 타고르의 15명의 아들 중
열넷째로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당시 타고르가
(家)는 벵골 문예부흥의 중심으로서 가족들이 문학적
천분이 있었고,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어려서부터
시를 쓰고, 16세 때 처녀시집『들꽃』을 내어‘벵골의 셸
리’라 불렸다.
그는 인도 고유의 종교와 문학적 교양을 닦고, 1877
년 영국에 유학하여 유럽 사상과 친숙하게 되었다. 귀
국 후 벵골어로 시·소설·희곡 등을 발표하는 동시에
스스로 작품을 영역하였고, 산문·희곡·평론 등에도
문재를 발휘하였다.
초기 작품은 유미적(唯美的)이었으나, 1891년 아버지
의 뜻으로 농촌에 있는 가문의 영지를 관리하면서 가난
한 농민생활과 접촉하게 되어 농촌개혁에 뜻을 둠과 동
시에, 작풍에 현실미를 더하게 되었다. 1901년에는 캘
커타 근교 자신의 영지에 샨티니케탄(평화학당)을 세워
동서양 전통 중 최상의 것을 선별해 조화시켜 가르치고
자 했다. 그가 세운 이 학당은 1921년에 국제적인 비스
바바라티대학으로 발전하였고, 오늘날에는 국립대학이
되었다.
아내와 딸의 죽음을 겪고 울적한 심경을 깊은 종교심
과 자연·조국에 대한 사랑이 담긴 훌륭한 시로 형상화
하였으며, 1910년에 출판한 시집『기탄잘리 Gitanjali』
(신께 바치는 송가)의 영역본으로 1913년 아시아인으로
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아 세계에 알려졌다. 그 뒤
세계 각국을 순방하면서 인도문학의 정수를 서양에 소
개하고 서양문학의 정수를 인도에 소개하여 동·서문화
의 융합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타고르는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도 수많은 작품을 썼
다. 그는 생애의 후기 25년 동안 21권의 저작을 펴냈다.
그는 이 기간의 대부분을 유럽, 아메리카, 중국, 일본,
말레이반도, 인도네시아 등지를 여행하며 강연하는 일
로 보냈다. 그는 1915년 영국으로부터 기사작위를 수여
받았으나, 1919년 암리차르에서의 대학살에 대한 항거
의 표시로 작위를 반납했다.
그의 작품은 시집에『신월(新月) The Crescent
Moon』·『원정(園丁) The Gardener』(1913) 등, 희곡에
「우체국 The Post Office」(1914)·「암실의 왕 The
King of the Dark Chamber」(1914), 소설에『고라
Gora』(1910)·『카블에서 온 과실장수』, 평론에「인간의
종교」·「내셔널리즘 Nationalism」(1917) 등이 있다. 그
리고 벵골 지방의 옛 민요를 바탕으로 많은 곡을 만들었
는데, 그가 작사·작곡한「자나 가나 마나 Jana Gana
Mana」는 인도의 국가가 되었다. 그래서 타고르는 마하
트마 간디와 함께 국부(國父)로 존경받고 있다.
한편 타고르는 한국을 소재로 한 두 편의 시, 「동방
(東方)의 등불」과「패자(敗者)의 노래」를 남겼다. 그 중
「패자의 노래」는 육당 최남선(崔南善)의 요청으로 3·1
운동의 실패로 실의에 빠져 있는 한국인을 위해 쓴 것
이고,「 동방의 등불」은 1929년 타고르가 일본에 들렀을
때 이태로(太), 당시 동아일보 도쿄지국장이 한국
방문을 요청하자 그에 응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생각하
며 한국인에게 보낸 격려의 송시이다.
일제의 식민 치하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꿋꿋하
게 살아가는 우리 민족을 격려하고, 강인하고도 유연한
민족성을‘동방의 밝은 빛’으로 표현하여 우리 민족에
게 격려와 위안을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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