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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노벨상의 인물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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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의 인물들 (3)
뒤낭[Dunant, (Jean-)Henri, 1828~1910] - 제1회 노벨평화상 수상(1901년)

글_이병욱 / 한국테마클럽

이번에는 국제적십자의 창시자로 제1회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앙리 뒤낭을 소개한다.

뒤낭(Dunant, Henri)은 1828년 5월 8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자크 뒤낭은 제네바 시의회 의원으로 제네바 고아수용소 자혜국장(慈惠局長)을 역임하였고, 어머니 앙트와네트는 종교개혁자 장칼뱅을 존경하는 개신교 신자로 고아원 등에 대한 봉사에 힘썼다. 부모의 영향을 받아 청소년기부터 환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구호하는데 힘쓴 앙리 뒤낭은 1844년 영국 복음주의자들이 만든 기독교 사회운동단체인 YMCA(기독교청년연합회) 창설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자신의 힘이 아닌 아버지의 경제적인 도움을 받아 활동하는 한계를 발견하고 뤼랑에소테은행에 입사하여 북아프리카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주민들의 빈곤한 생활 모습을 보게 된 뒤낭은 미개지역의 경제계획을 꿈꾸며 알제리에 제분회사(製粉會社)를 설립하였다.

설명 좌로부터 스위스(1928) - 뒤낭 탄생 100주년 기념 / 벨기에(1939) - 적십자의 창시자 앙리 뒤낭 / 독일(1952) - 앙리 뒤낭
설명 좌로부터 자르(1953) - 뒤낭 탄생 125주년 기념 / 알제리(1954) - 적십자의 창시자 앙리 뒤낭 / 동독(1957) - 제10회 적십자 세계총회기념

1858년 이탈리아 통일전쟁 때 제분회사의 수리권(水利權)을 얻고자 북이탈리아로 나폴레옹 3세를 찾아가던 길에, 솔페리노전투에서 생긴 수천의 부상자를 만나 국적에 구애 없는 구호에 참가했다. 1862년, 그때의 경험을「솔페리노의 회상(Un souvenir de Solfe´- rino, 1862)」이란 제목으로 출판, 전시의 부상자 구호를 위한 중립적 민간 국제기구 창설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뒤낭은 1901년 박애정신과 평화에 기여한 공로가 인정되어 제1회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1864년, 뒤낭의 생일인 5월 8일을‘적십자의 날’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으며, 현재까지 그를‘적십자운동의 아버지’로 부르고 있다.

설명 좌로부터 그리스(1959) / 벨기에(1959) / 스웨덴(1959)
설명 좌로부터 칠레(1959) / 노르웨이(1961) - 제1회 노벨상 수상자, 뒤낭과 파시 / 그리스(1963) - 국제적십자 창립 100주년 / 스위스(1978) - 뒤낭 탄생 150주년 기념
국제적십자 창립 (1863년 10월 29일)

1859년 6월과 7월에 걸친 이탈리아 통일전쟁 때의 상병자구호 경험과 이로 인한 구호단체 설립의 필요성은 앙리 뒤낭으로 하여금「솔페리노의 회상」이라는 글을 쓰게 하였고, 이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제네바 공익협회에서 위촉한‘5인위원회’가 전시상병자 구호를 위한 국제적 상설기관의 설치를 유럽 여러 나라의 유력자에게 제창하였다.

이어 1863년 10월 26일부터 29일까지 제네바에서 열린 창립회의에서는 전시상병자 구호를 위하여 군위생부대의 보조기관으로서 스위스에 국제적십자위원회와 각국에 적십자사를 설립하여 적십자사와 그 소속 간호요원에게는 중립적 지위를 인정하고, 국제적 보호를 부여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간호요원이 패용하는 만국공통의 표장으로서‘흰 바탕에 붉은 십자’가 그려진 적십자 마크가 채택되었다. 그것은 적십자 창시자의 조국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스위스 국기의 흰색과 붉은색의 배색을 반대로 한 것이었다.

1864년 스위스 연방정부의 주최로 미국·유럽 17개국의 정부대표가 모인 국제회의가 제네바에서 개최되고 전시상병자의 보호, 응급구호소·육군병원·의무요원· 간호요원의 중립, 적십자 표장의 채택 등을 규정한‘제네바협약(적십자조약)’이 채택되었다.

설명 모나코(1978) 뒤낭 탄생 150주년 기념
제1회 노벨상 시상식(1901년 12월 10일)

오늘날 노벨상 시상식은 대단히 명예롭고 언론의 조명을 받아 화려하기까지 하지만 노벨상의 첫 걸음마는 그렇지 못했나보다.

제1회 노벨상 시상식은 20세기의 여명이 밝아오던 1901년 12월 10일 오후 4시 30분,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열렸다. 3150만 스웨덴 크로네(약 920만 달러)라는, 당시로선 엄청난 거액을 종자돈으로 내놓은 알프레드 노벨의 서거 5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수상자는 5개 부문에 6명으로, 물리학상 빌헬름 뢴트겐(독일), 화학상 야코뷔스 반트호프(네덜란드), 생리·의학상 에밀 폰 베링(독일), 문학상 쉴리 프뤼돔(프랑스), 평화상은 앙리 뒤낭(스위스)과 프레데리크 파시(프랑스)가 공동으로 수상하였다.

그러나 막상 시상식은 크고 작은 말썽으로 뒤숭숭했다. 국왕 오스카르 2세가 요즘 말로‘외화 낭비’라는 이유로 시상식에 불참해 잔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시상식장에 하객이 없어서 종업원, 요리사까지 드레스를 입고 자리를 메워야 했다. 게다가 문학상에서는 노벨이 생전에 좋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장 유력한 후보였던 에밀 졸라가 제외되고, 프랑스 작가 쉴리 프뤼돔이 뽑혀 공정성 논란마저 빚어졌다. 스웨덴 작가들은 또 "왜 톨스토이에게 상을 주지 않느냐"고 들고 일어나기도 했다. 메달도 제작자가 납품날짜를 못 맞추는 바람에 임시메달을 수여하는 촌극이 연출되었다니 당시의 상황이 가히 짐작이 간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국제적십자의 창시자 앙리 뒤낭과 국제평화연맹의 설립자 겸 총재 프레데리크 파시의 평화상 공동 수상에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던 모양이다.

설명 스웨덴(1991) - 1901년 노벨평화상 수상 / 모나코(2001) - 노벨상 수상 100주년 / 노르웨이(2001) - 노벨상 100주년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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