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잠을 자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서 해왔다. 이것은 내 목숨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말이다. 안창호는 1978년 평남 강서에서 농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일제 강점기 속에서 애국계몽 활동과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이다.
안창호 선생은 1897년 19세때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1899년 한국 최초의 남녀공학인 '점진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는 국내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일제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세계 각지의 동포들이 모금한 자금을 모아 독립운동가들에게 전달하고 독립운동을 이어나갔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1907년 귀국하여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하고 '대한매일신보'를 기관지로 민중운동을 이어나간다.
그 후에도 그는 국내외에서 활동하며 청년 엘리트 단체 흥사단 조직을 결성하였다. 흥사단은 그가 세운 청년학우회와 유길준의 흥사단 취지를 계승한것으로, 미국에 본부를 두고 민족운동의 간부를 양성하는데 이바지 하였다.
그는 3.1운동 이후에 상해로 건너가 상해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직을 맡았다. 그 후 1932년 4월 윤봉길의 상해 훙커우공원 폭탄사건과 관련해 4년의 실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와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는 등 수감생활을 하다가 1938년 3월 10일 경성대학부속병원에서 간경화증으로 서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