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감옥에서 사망한 미국의 화학재벌 상속인 존 듀퐁이 세계에서 가장 비싼 우표 중 하나인 마젠타
우표를 은행금고 속에 남겨두고 떠났다는 이야기를 전한 바 있다. 이 기사를 보고 누군가 궁금증을
나타냈다. “그럼 듀퐁이 세계에서 최고 가는 우표수집가였나?”
우표를 은행금고 속에 남겨두고 떠났다는 이야기를 전한 바 있다. 이 기사를 보고 누군가 궁금증을
나타냈다. “그럼 듀퐁이 세계에서 최고 가는 우표수집가였나?”
정답을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이다. 듀퐁이 마젠타 우표를 비롯해 우표수집하는 데 많은 돈을 쓴 것은
사실이지만, 세계 1위의 자리는 감히 넘볼 수 없다. 필립 폰 페라리(1850~1917)라고 하는 전설의 수집가가
있기 때문이다.
페라리 같은 우표수집광은 세계 역사에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견해다. 문자 그대로 전무후무한 수집가다.
페라리가 사상 최고의 수집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출신배경 때문이다. 그는 19세기 유럽에서 제일
가는 부잣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라파엘레 데 페라리는 오스트리아와 포르투갈, 이탈리아 북부와
프랑스에서 철로를 놓고 수에즈에 운하를 건설한 은행가이자 사업가로 교황 그레고리 16세에 의해
갈리에라 공작 칭호를 받은 대부호였고, 어머니 마리아 데 브리뇰 살레는 모나코 왕비의 손녀딸이었다.
그러니 돈 걱정은 눈곱만큼도 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태어나서 죽기 직전까지 거주한 집이 현재 프랑스
총리관저로 쓰이는 마티뇽이라는 사실만 보아도 그의 가정환경을 알 수 있다. 당시 갈리에라 공작은
럭셔리한 호텔의 대명사였던 이 건물을 매입해 프랑스 최고의 사교장으로 활용했다.
하지만 페라리는 아버지 사업에는 관심이 없고 우표수집하는 것을 좋아했다. 15살 때부터 우표수집에 손을
대더니 점점 우표광이 돼 갔다. 그는 술 담배를 일절 하지 않았고 남들과 어울려 파티하는 것도 싫어했다.
상류층이 즐겨다니는 극장이나 고급 레스토랑에는 발걸음을 하지 않았고, 친구를 사귀지도 않았다. 결혼도
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 우표에만 매달렸다.
그는 세상에서 귀하고 이름있는 우표라면 모조리 손에 넣고 싶어했다. 그래서 우표경매가 열리는 곳이면
유럽 어디를 막론하고 날아갔다. 늘 기름에 전 베레모와 낡은 정장, 싸구려 신발을 신은 채여서 겉보기엔
부랑자같았다. 하지만 이 차림새로 그는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비싼 우표로 꼽히는 스웨덴 황색
트레스킬링 우표, 존 듀퐁의 유품인 마젠타 우표 등 유명 우표들을 파격적인 가격을 주고 사들였다. 자신이
직접 경매에 갈 수 없을 땐 유명 우표상을 고용해 세계 각처를 돌아다니며 싹쓸이해오라고 시켰다. 워낙
가격을 따지지 않고 사들이다보니 페라리를 겨냥한 위조품들이 판을 치기도 했다. 페라리는 때때로
위조품인 줄 알면서도 일부러 사들이기도 했는데, 베를린의 한 가난한 우표상에게 미화 150 달러를 주고
우표를 산 뒤 “그는 돈이 몹시 필요했으나 가진 게 없었다. 그래서 나는 위조품을 사줬다”고 말한 적이
있다.
시간이 가면서 페라리가 사는 마티뇽, 그러니까 지금의 총리관저는 우표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방 두 개가
완전히 우표로 채워졌고, 세번째 방에도 우표가 쌓여갔다. 페라리는 이 우표를 자기 주변의 몇몇 사람
외에는 보여주지 않았고, 누구에게 팔거나 교환할 생각은 더더욱 하지 않았다. 그의 사전에는 오직 매입,
또 매입이 있을 뿐이었다. 그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돈은 1억2000만 프랑, 미화로 2100만 달러. 이 돈을
거의 다 우표 구입에 쏟아부은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 페라리의 운명을 가른 것은 전쟁이었다. 프랑스 거주 오스트리아인이었던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나자 우표앨범을 오스트리아 대사관에 두고 스위스로 피신했고, 그곳에서 숨졌다. 전쟁이 끝나자 프랑스
정부는 페라리의 콜렉션을 전리품으로 압수, 전쟁배상금으로 쓸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1921년부터
26년까지 5년에 걸쳐 런던, 파리 등 14곳에서 경매를 열었다. 경매 타이틀에 ‘페라리’라는 이름을 쓰지는
않았다. ‘최근 사망한 한 명사가 조지 3세에서 현재 시대에 이르기까지 수집한 대단히 유명한 콜렉션
카탈로그’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래도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페라리가 평생을 바쳐 모은
우표들은 그렇게 해서 세계의 수집가들 손으로 하나 둘 팔려나갔고, 프랑스 정부는 현금 3000만 프랑을
손에 쥐게 됐다. 우표가 한 나라의 전쟁배상금이 된 것이다.
사실이지만, 세계 1위의 자리는 감히 넘볼 수 없다. 필립 폰 페라리(1850~1917)라고 하는 전설의 수집가가
있기 때문이다.
페라리 같은 우표수집광은 세계 역사에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견해다. 문자 그대로 전무후무한 수집가다.
페라리가 사상 최고의 수집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출신배경 때문이다. 그는 19세기 유럽에서 제일
가는 부잣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라파엘레 데 페라리는 오스트리아와 포르투갈, 이탈리아 북부와
프랑스에서 철로를 놓고 수에즈에 운하를 건설한 은행가이자 사업가로 교황 그레고리 16세에 의해
갈리에라 공작 칭호를 받은 대부호였고, 어머니 마리아 데 브리뇰 살레는 모나코 왕비의 손녀딸이었다.
그러니 돈 걱정은 눈곱만큼도 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태어나서 죽기 직전까지 거주한 집이 현재 프랑스
총리관저로 쓰이는 마티뇽이라는 사실만 보아도 그의 가정환경을 알 수 있다. 당시 갈리에라 공작은
럭셔리한 호텔의 대명사였던 이 건물을 매입해 프랑스 최고의 사교장으로 활용했다.
하지만 페라리는 아버지 사업에는 관심이 없고 우표수집하는 것을 좋아했다. 15살 때부터 우표수집에 손을
대더니 점점 우표광이 돼 갔다. 그는 술 담배를 일절 하지 않았고 남들과 어울려 파티하는 것도 싫어했다.
상류층이 즐겨다니는 극장이나 고급 레스토랑에는 발걸음을 하지 않았고, 친구를 사귀지도 않았다. 결혼도
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 우표에만 매달렸다.
그는 세상에서 귀하고 이름있는 우표라면 모조리 손에 넣고 싶어했다. 그래서 우표경매가 열리는 곳이면
유럽 어디를 막론하고 날아갔다. 늘 기름에 전 베레모와 낡은 정장, 싸구려 신발을 신은 채여서 겉보기엔
부랑자같았다. 하지만 이 차림새로 그는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비싼 우표로 꼽히는 스웨덴 황색
트레스킬링 우표, 존 듀퐁의 유품인 마젠타 우표 등 유명 우표들을 파격적인 가격을 주고 사들였다. 자신이
직접 경매에 갈 수 없을 땐 유명 우표상을 고용해 세계 각처를 돌아다니며 싹쓸이해오라고 시켰다. 워낙
가격을 따지지 않고 사들이다보니 페라리를 겨냥한 위조품들이 판을 치기도 했다. 페라리는 때때로
위조품인 줄 알면서도 일부러 사들이기도 했는데, 베를린의 한 가난한 우표상에게 미화 150 달러를 주고
우표를 산 뒤 “그는 돈이 몹시 필요했으나 가진 게 없었다. 그래서 나는 위조품을 사줬다”고 말한 적이
있다.
시간이 가면서 페라리가 사는 마티뇽, 그러니까 지금의 총리관저는 우표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방 두 개가
완전히 우표로 채워졌고, 세번째 방에도 우표가 쌓여갔다. 페라리는 이 우표를 자기 주변의 몇몇 사람
외에는 보여주지 않았고, 누구에게 팔거나 교환할 생각은 더더욱 하지 않았다. 그의 사전에는 오직 매입,
또 매입이 있을 뿐이었다. 그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돈은 1억2000만 프랑, 미화로 2100만 달러. 이 돈을
거의 다 우표 구입에 쏟아부은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 페라리의 운명을 가른 것은 전쟁이었다. 프랑스 거주 오스트리아인이었던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나자 우표앨범을 오스트리아 대사관에 두고 스위스로 피신했고, 그곳에서 숨졌다. 전쟁이 끝나자 프랑스
정부는 페라리의 콜렉션을 전리품으로 압수, 전쟁배상금으로 쓸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1921년부터
26년까지 5년에 걸쳐 런던, 파리 등 14곳에서 경매를 열었다. 경매 타이틀에 ‘페라리’라는 이름을 쓰지는
않았다. ‘최근 사망한 한 명사가 조지 3세에서 현재 시대에 이르기까지 수집한 대단히 유명한 콜렉션
카탈로그’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래도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페라리가 평생을 바쳐 모은
우표들은 그렇게 해서 세계의 수집가들 손으로 하나 둘 팔려나갔고, 프랑스 정부는 현금 3000만 프랑을
손에 쥐게 됐다. 우표가 한 나라의 전쟁배상금이 된 것이다.
출처 : 이종탁(주간경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