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그 특사 100년을 기념해 발행한 우표
우표는 그 나라의 자연과 역사·사회·문화 등을 표현하는 축소 예술의 꽃이다. 우표수집을 취미로 하면 역사적 안목과 문화적 지성, 예술적 감각을 모두 높일 수 있다. 지동설을 주창한 코페르니쿠스, 순수이성비판의 철학자 칸트부터 일제시대 민족의 횃불 안중근, 한국이 낳은 예술가 백남준 등 동서고금의 인물과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잘 정리된 우표수집철을 가리켜 ‘지식과 상식의 보석함’이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우표수집이 최고의 취미로 꼽힌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유명한 우표수집가인 미국의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1882~1945)가 회고록에서 “우표에서 얻는 지식이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더 많다”고 한 명언은 두고두고 인용된다. 시인 여해룡씨도 “우표로 세상을 배웠다”고 말하는 우표수집 전문가다. 그에 따르면 세상에서 가장 많이 발행한 인물우표 중 하나가 북한 김일성이고, 남한에서 가장 많이 발행한 인물우표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다. 죽은 뒤에나 발행하는 인물우표를 생전에 찍어냈으니, 남·북한의 정치후진성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셈이다.
우표수집가는 영어로 필라텔리스트(philatelist)라고 한다. 1864년 11월 엠 헬팽이라는 프랑스의 우표수집가가 그리스어로 사랑이라는 뜻의 philo(필로)와, 요금을 지불했다는 의미의 atelos(아텔로스)를 합쳐 philately(필라텔리)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뒤 세계 용어가 됐다고 한다. 작가 이기열씨가 디지털포스트에 소개한 글에 따르면 초대 대통령 이승만도 필라텔리스트였다. 1957년 1월 서울중앙우체국 새 청사 낙성식때 이승만이 축사를 통해 “갑신정변때 우정총국의 우표가 약탈당하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했다는 것이다. 갑신정변이 1884년 일어났으니까 70년도 더 지난 시점이었지만, 우표수집가였기에 기억이 또렷이 남아 있었을 것이라고 이기열씨는 해석했다.
독일 우정공사가 스스로 우표 수집가라고 여기는 독일인이 750만 명에 이른다는 조사 결과를 내놓은 적이 있다. 독일 인구의 11.5%가 우표수집을 즐긴다는 것이다. 이들을 모두 필라텔리스트라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우표수집 취미를 촌스럽게 여기는 러시아 분위기와 사뭇 다르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지난주 우정사업본부에서 의미 있는 기념우표를 발행했다. 100년 전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은 이준·이상설·이위종 등 세 특사가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던 네덜란드 헤이그로 날아가 일제의 강탈을 국제사회에 고발한 사건을 기리는 우표다. 그 역사성을 살리는 차원에서 고종황제의 위임장을 우표에 새겼다. 필라텔리스트라면 우표와 함께 100년 전 역사 속으로 빠져들 수 있는 기회다. 그런 점에서 우표수집은 촌스러운 취미가 아니라 지적 품위를 높여주는 교양활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