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시대를 대표하는 미술품의 하나인 고려청자는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제작에 성공하며 화려하게 동시대를 풍미하였다.
고려청자는 중국 자기의 양식을 답습하는데 그치지 않고 고려만의
독특한 미감을 살려 색과 장식기법, 무늬, 그리고 기형 등에서 중국과
는 다른 면모를 뚜렷하게 나타냈다. 특히 옥(玉)처럼 푸른 빛깔의
‘비색(翡色)’과 ‘상감(象嵌)’의 장식기법은 고려청자의 독창성을 가장
잘 나타내준다.
청자 참외모양 병은 색과 형태에서 고려청자를 대표하는 최고의
예술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담녹색을 띠는 유약은 빙렬 하나 없이
깨끗하고 바탕흙과 조화를 이뤄 치밀하게 입혀져 있으며 미세한
기포가 가득하다. 참외꽃을 연상시키는 구연부와 유려한 목선, 양감
가득한 참외모양의 몸체, 주름치마를 보는 듯한 높은 굽 등 전체적인
비례감과 선, 그리고 기술력의 조화는 완벽하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제작에 성공하며 화려하게 동시대를 풍미하였다.
고려청자는 중국 자기의 양식을 답습하는데 그치지 않고 고려만의
독특한 미감을 살려 색과 장식기법, 무늬, 그리고 기형 등에서 중국과
는 다른 면모를 뚜렷하게 나타냈다. 특히 옥(玉)처럼 푸른 빛깔의
‘비색(翡色)’과 ‘상감(象嵌)’의 장식기법은 고려청자의 독창성을 가장
잘 나타내준다.
청자 참외모양 병은 색과 형태에서 고려청자를 대표하는 최고의
예술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담녹색을 띠는 유약은 빙렬 하나 없이
깨끗하고 바탕흙과 조화를 이뤄 치밀하게 입혀져 있으며 미세한
기포가 가득하다. 참외꽃을 연상시키는 구연부와 유려한 목선, 양감
가득한 참외모양의 몸체, 주름치마를 보는 듯한 높은 굽 등 전체적인
비례감과 선, 그리고 기술력의 조화는 완벽하다.
화려한 무늬와 채색, 장식은 없지만 이처럼 아름다운 청자를 만들 수 있었던 당시 장인들의 높은 수준과
이를 향유했던 사람들의 미감을 한껏 엿볼 수 있다.
이러한 형태의 병은 중국 고대의 청동기인 준(尊)이라는 술병에서 그 형태적 원류를 찾을 수 있는데, 북송
시대의 자주요(磁州窯), 경덕진요(景德鎭窯), 요주요(耀州窯) 등에서 도자기로 제작되어 유행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전래되어 고려청자 제작에 영향을 준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고려의 병은 구연부와
몸체가 과장되고 굽이 낮아 둔중한 느낌을 주는 중국의 것과 달리 완벽한 균형감과 정제된 미감을 재창조
하여 모방을 넘은 ‘고려화’를 이룩하였다. 1970년대 국립중앙박물관이 발굴한 전라남도 강진(康津)의
사당리(沙堂里) 가마터에서 이 병과 같은 특징의 청자 조각이 여러 점 발견된 바 있다.
한편, 고려 17대 왕인 인종(仁宗, 1109-1146)의 장릉(長陵)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이 병은 고려청자의
미감 가운데 하나인 색의 아름다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비색의 기준이 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비색의 기준, 그렇다면 비색은 과연 무슨 색인가? 아쉽게도 비색이 어떤 색인가에 대한 문제는 아직 풀지
못했다. 비색의 한자를 풀어 보면 ‘비(翡)’는 물총새를 일컫는다. 즉 물총새의 색, 더 자세히 말하면 물총새
의 깃털이 반사하는 오묘한 빛깔의 푸른 색이 비색이라고 가정해 보는 정도의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중국의 여러 문헌 기록을 통해서도 비색에 대해 살펴볼 수 있다. 중국 북송의 학자인 태평노인(太平老人)은
『수중금(袖中錦)』에서 고려의 비색을 ‘천하제일’이라고 극찬했다. 또한 1123년(인종 1) 송나라의
사신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서 “도기의 색은 푸른데
고려인은 비색이라 부른다”라고 하였다. 그가 지칭한 비색은 인종의 묘소인 장릉에서 출토된 청자 참외
모양 병의 색감과 가장 비슷할 것으로 파악되는데, 시기적으로 가장 근접해 있기 때문에 비색의 기준이
되고 있다.
이를 향유했던 사람들의 미감을 한껏 엿볼 수 있다.
이러한 형태의 병은 중국 고대의 청동기인 준(尊)이라는 술병에서 그 형태적 원류를 찾을 수 있는데, 북송
시대의 자주요(磁州窯), 경덕진요(景德鎭窯), 요주요(耀州窯) 등에서 도자기로 제작되어 유행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전래되어 고려청자 제작에 영향을 준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고려의 병은 구연부와
몸체가 과장되고 굽이 낮아 둔중한 느낌을 주는 중국의 것과 달리 완벽한 균형감과 정제된 미감을 재창조
하여 모방을 넘은 ‘고려화’를 이룩하였다. 1970년대 국립중앙박물관이 발굴한 전라남도 강진(康津)의
사당리(沙堂里) 가마터에서 이 병과 같은 특징의 청자 조각이 여러 점 발견된 바 있다.
한편, 고려 17대 왕인 인종(仁宗, 1109-1146)의 장릉(長陵)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이 병은 고려청자의
미감 가운데 하나인 색의 아름다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비색의 기준이 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비색의 기준, 그렇다면 비색은 과연 무슨 색인가? 아쉽게도 비색이 어떤 색인가에 대한 문제는 아직 풀지
못했다. 비색의 한자를 풀어 보면 ‘비(翡)’는 물총새를 일컫는다. 즉 물총새의 색, 더 자세히 말하면 물총새
의 깃털이 반사하는 오묘한 빛깔의 푸른 색이 비색이라고 가정해 보는 정도의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중국의 여러 문헌 기록을 통해서도 비색에 대해 살펴볼 수 있다. 중국 북송의 학자인 태평노인(太平老人)은
『수중금(袖中錦)』에서 고려의 비색을 ‘천하제일’이라고 극찬했다. 또한 1123년(인종 1) 송나라의
사신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서 “도기의 색은 푸른데
고려인은 비색이라 부른다”라고 하였다. 그가 지칭한 비색은 인종의 묘소인 장릉에서 출토된 청자 참외
모양 병의 색감과 가장 비슷할 것으로 파악되는데, 시기적으로 가장 근접해 있기 때문에 비색의 기준이
되고 있다.
기록으로 살펴본 장릉(長陵, 고려 인종의 능)의
위치는
개성 일대로 추정될 뿐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고려사
( 高麗史) 』에는 그 위치가 ‘ 왕성 남쪽’이라 적혀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 勝覽)』에는 ‘개성 서쪽
벽곶동(碧串洞)’으로 기록되어 있다. 1916년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대정오년도고적 조사보고(大正五年度古蹟
調査報告)』의 「고려제능묘 조사보고서(高麗諸陵墓調査
報告書)」에서는 신증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토대로
장릉의 위치를 벽곶동 으로 추정하였지만, 정확한 소재를
찾지 못하였다.
인종의 장릉(長陵)에서는 청자 참외모양 병, 청자 합,
청자 잔, 청자 받침대 등의 청자 4점 을 비롯하여, ‘황통6년’
의 명문이 있는 시책, 청동 도장, 은수저, 청동 내함, 석제
외함 등이 함께 출토되었다. 이 출토품들은 제작 연대를
가늠할 수 있는 편년자료가 매우 드물어서 전성기
고려청자를 이해하고 연구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인
동시에 12세기 전반 고려의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개성 일대로 추정될 뿐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고려사
( 高麗史) 』에는 그 위치가 ‘ 왕성 남쪽’이라 적혀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 勝覽)』에는 ‘개성 서쪽
벽곶동(碧串洞)’으로 기록되어 있다. 1916년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대정오년도고적 조사보고(大正五年度古蹟
調査報告)』의 「고려제능묘 조사보고서(高麗諸陵墓調査
報告書)」에서는 신증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토대로
장릉의 위치를 벽곶동 으로 추정하였지만, 정확한 소재를
찾지 못하였다.
인종의 장릉(長陵)에서는 청자 참외모양 병, 청자 합,
청자 잔, 청자 받침대 등의 청자 4점 을 비롯하여, ‘황통6년’
의 명문이 있는 시책, 청동 도장, 은수저, 청동 내함, 석제
외함 등이 함께 출토되었다. 이 출토품들은 제작 연대를
가늠할 수 있는 편년자료가 매우 드물어서 전성기
고려청자를 이해하고 연구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인
동시에 12세기 전반 고려의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출처 : 우표취미생활인의 교양지 월간 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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