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 악극의 영향은 가극에만 그치지 않고 교향곡의 영역에도 미쳤지만, 한편 하이든 이래의 순수
교향곡, 실내악 그리고 독일 리트의 전통은 여전히 계승되고 있었다.
교향곡, 실내악 그리고 독일 리트의 전통은 여전히 계승되고 있었다.
브람스(Johannes Brahms, 1833-1897, 독일)
독일의 함부르크에서 태어나 8세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였다. 1853년 연주여행을 다니다가 당시의 명
바이올리니스트 요하임과 슈만, 리스트 등을 만났다. 낭만파 음악의 화려한 시대에 고전파의 전통을 존중하여, 흔히
신 고전주의자라고 일컬어진다. 이는 그의 음악적 소재가 고전주의 소나타와 다성 기법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862년 빈을 방문했던 그는 1863년부터 그곳에서 평생을 지냈다.
독일의 함부르크에서 태어나 8세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였다. 1853년 연주여행을 다니다가 당시의 명
바이올리니스트 요하임과 슈만, 리스트 등을 만났다. 낭만파 음악의 화려한 시대에 고전파의 전통을 존중하여, 흔히
신 고전주의자라고 일컬어진다. 이는 그의 음악적 소재가 고전주의 소나타와 다성 기법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862년 빈을 방문했던 그는 1863년부터 그곳에서 평생을 지냈다.
안톤 브루크너(Anton Bruckner, 1824-1896, 독일)
오스트리아 출신인 그는 처음 교회 성가대원으로 음악 세계에 발을 들여 놓았는데, 빈으로 가서 제흐터와 함께
공부한 그는 빈에 정착하여 음악원 교수로 일했다. 1856년부터 8년간 린츠의 대성당에서 오르간 연주자로 있었는데,
바그너 작품을 접하고는 바그너의 열렬한 숭배자가 되었으나, 자신은 오페라를 쓰지 않고 9개의 교향곡을 비롯해
미사곡과 현악 5중주 등을 남겼다.
오스트리아 출신인 그는 처음 교회 성가대원으로 음악 세계에 발을 들여 놓았는데, 빈으로 가서 제흐터와 함께
공부한 그는 빈에 정착하여 음악원 교수로 일했다. 1856년부터 8년간 린츠의 대성당에서 오르간 연주자로 있었는데,
바그너 작품을 접하고는 바그너의 열렬한 숭배자가 되었으나, 자신은 오페라를 쓰지 않고 9개의 교향곡을 비롯해
미사곡과 현악 5중주 등을 남겼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1864-1949, 독일)
뮌헨에서 태어나 가르미쉬(바바리아)에서 세상을 떠난 후기 낭만파 음악의 거장인 그는 근대 독일을 대표하는
최대의 작곡가이며, 표제음악과 교향시 분야에 큰 업적을 남겼다.
뮌헨에서 태어나 가르미쉬(바바리아)에서 세상을 떠난 후기 낭만파 음악의 거장인 그는 근대 독일을 대표하는
최대의 작곡가이며, 표제음악과 교향시 분야에 큰 업적을 남겼다.
19세기 중엽의 약 30년 동안(1830년부터 1860년경까지) 프랑스는 마이어베어나 오베르의 가극에 지배되고
있었다고 해도 좋다. 그러나, 1860년경부터 마이어베어 일파는 몰락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고 샤를
구노의 출현은 그 몰락에 결정적이었다.
있었다고 해도 좋다. 그러나, 1860년경부터 마이어베어 일파는 몰락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고 샤를
구노의 출현은 그 몰락에 결정적이었다.
샤를 구노 (Charles Gounod, 1818-1893, 프랑스)
프랑스 음악사상 빛나는 존재인 구노는 오페라와 종교음악의 작곡가로서 이름을 날린 사람이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감수성과 가톨릭 신자로서 조용함을 겸한 그는 명쾌한 선율과 부드럽고 투명한 색채감을 가지고 그의 두 가지
성격을 잘 융합시켜 대중적이면서도 품위 있는 서정성이 내포된 작품을 만들었다. 그가 남긴 순수한 가곡은 근대
프랑스의 가곡에 큰 영향을 주기도 했다.
프랑스 음악사상 빛나는 존재인 구노는 오페라와 종교음악의 작곡가로서 이름을 날린 사람이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감수성과 가톨릭 신자로서 조용함을 겸한 그는 명쾌한 선율과 부드럽고 투명한 색채감을 가지고 그의 두 가지
성격을 잘 융합시켜 대중적이면서도 품위 있는 서정성이 내포된 작품을 만들었다. 그가 남긴 순수한 가곡은 근대
프랑스의 가곡에 큰 영향을 주기도 했다.
생상스(Camille Saint Saens, 1835-1921, 프랑스)
어릴 적부터 피아노의 신동이라 불린 그는 음악 학교에서 구노 등의 제자로 음악을 공부했다. 오르간 연주 역시
잘해서 17세에 성 마리아 교회 오르간을 맡았고, 21세 때는 콩쿠르에서 1등을 하기도 했다. 교회의 오르가니스트,
작곡가, 지휘자로서도 활약했지만 시인, 화가, 철학자로서도 알려져 박식하고 다재다능한 음악가였다. 작품으로는
모음곡 ‘동물의 사육제’, 가극 ‘삼손과 델릴라’, 교향시 ‘주검의 무도’ 등이 유명하고, 낭만파와 인상파 음악의 가교
노릇을 한 중요 음악가이다.
어릴 적부터 피아노의 신동이라 불린 그는 음악 학교에서 구노 등의 제자로 음악을 공부했다. 오르간 연주 역시
잘해서 17세에 성 마리아 교회 오르간을 맡았고, 21세 때는 콩쿠르에서 1등을 하기도 했다. 교회의 오르가니스트,
작곡가, 지휘자로서도 활약했지만 시인, 화가, 철학자로서도 알려져 박식하고 다재다능한 음악가였다. 작품으로는
모음곡 ‘동물의 사육제’, 가극 ‘삼손과 델릴라’, 교향시 ‘주검의 무도’ 등이 유명하고, 낭만파와 인상파 음악의 가교
노릇을 한 중요 음악가이다.
비제(Georges Bizet, 1838-1875, 프랑스)
파리에서 음악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단명의 작곡가로서 10세 때 파리 음악학교에 입학, 19세 때 오페레타
‘기적을 일으키는 의사’로 로마 대상을 받고 3년간 로마 유학을 하였다. 오페라 「진주잡이 어부」, 「페르트의
하녀」, 「겁먹은 이반」, 「카르멘」이 있다. 선명한 선율과 멜로디의 아름다움으로 철학자 니체에 의해 바그너와
쌍벽을 이루는 음악가로 칭송을 받았다. 알퐁스 도데의 희곡에 음악을 붙인 실내악, 조곡 「아를르의 여인」이
유명하고 교향곡 제1번이 있으며, 피아노 듀엣의 「어린이 유희」가 전해지고 있다.
파리에서 음악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단명의 작곡가로서 10세 때 파리 음악학교에 입학, 19세 때 오페레타
‘기적을 일으키는 의사’로 로마 대상을 받고 3년간 로마 유학을 하였다. 오페라 「진주잡이 어부」, 「페르트의
하녀」, 「겁먹은 이반」, 「카르멘」이 있다. 선명한 선율과 멜로디의 아름다움으로 철학자 니체에 의해 바그너와
쌍벽을 이루는 음악가로 칭송을 받았다. 알퐁스 도데의 희곡에 음악을 붙인 실내악, 조곡 「아를르의 여인」이
유명하고 교향곡 제1번이 있으며, 피아노 듀엣의 「어린이 유희」가 전해지고 있다.
참고 문헌
-『명곡감상교실』 계몽사. 1981.
-『새음악통론』 일신서적출판사. 1992.
-『동아세계대백과사전』 1989.
-『명곡감상교실』 계몽사. 1981.
-『새음악통론』 일신서적출판사. 1992.
-『동아세계대백과사전』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