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사람들은 경주 시내 곳곳에 들어서 있는 거대한 무덤들을 보면서
놀라움을 금하지 못한다. 경주 분지의 평야에는 신라 왕족들의 무덤 수 백여
기가 현대 건축물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작은 무덤들이
지름이 80m가 넘는 큰 무덤들을 호위하듯이 에워싸고 있어 천 오백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고대국가의 위업을 달성한 신라 왕의 불멸이 느껴진다.
이 무덤의 정체가 밝혀지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전의 일이 아니다. 1921년
9월, 경주 노서동의 어느 민가에서 주막을 확장하기 위해 나지막한 구릉을
파내다가 신라황금을 발견하는 일대 사건이 일어나면서부터이다. 그 날
집주인은 집터의 낮은 곳을 메우기 위해 주변 구릉에서 흙을 파내어 썼다.
그런데 이 흙 속에서 아이들이 구슬들을 발견하여 갖고 놀고 있었던 것이다. 9월
24일에 여기를 지나던 경주경찰서 소속 일경(日警)이 이를 우연히 보았고, 흙을 파냈던 언덕에서 유물들이 드러난
것을 확인했다.
경주경찰서는 곧바로 군청과 경상북도청을 거쳐 조선총독부에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이 와중에 경찰서장과
경주보통학교장 등은 도난을 우려해 금관 등 주요 부장품을 서둘러 수습하였다. 10월 2일 조선총독부 소속 일본 학자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하마다 고우가쿠[濱田耕作], 우메하라 수에지[梅原末治] 등이 경주에 내려왔을 때는 이미 모든
상황이 종료된 뒤였다. 무덤에서 나온 부장품의 정리 및 보고서 발간작업은 하마다의 지도하에 우메하라가
주도하였다. 우메하라는 당시 발굴 현장 참여자들에게 전해 들은 바를 기초로 부장품의 위치를 기록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뒤 금관 등 주요 출토품은 연구 등을 위해 서울에 있는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 옮겨졌으나, 1923년
경주에 금관 등을 보관하고 전시하는 ‘금관고(金冠庫)’라는 건물을 짓게 됨에 따라 경주로 다시 돌아왔다. 1924년에
처음으로 보고서가 발간되었으며, 무덤의 명칭은 금관의 발견을 기념하는 뜻에서 금관총이라 불렀다.
신라황금은 이렇게 금관총의 발견과 함께 처음으로 세상에 드러났다. 이전에는 무덤을 보호하고 있던 막대한 양의
돌무더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신라 무덤의 구조나 출토품에 대해 제대로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토록
많은 황금이 묻혀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이 일을 계기로 조선총독부는 고적조사과를 신설하여
본격적으로 신라 무덤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금관총 금관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금관이자 비록 일제강점기의 조사라는 한계는 있었지만 ‘황금의
나라, 신라’를 세상에 알리는 첫 신호탄이었다. 이후 금관은 1924년 금령총(金鈴塚), 1926년 서봉총(瑞鳳塚), 1973년
천마총(天馬塚), 1974년 황남대총(皇南大塚)에서 잇따라 발굴되었다.
금 관 은 최 고 지 배 자 인 마 립 간 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역사 기록에 나오는 마립간은 모두 여섯
명뿐인데, 지금까지 확인된 금관만 해도 여섯 개이기
때 문 이 다 . 아 직 발 굴 되 지 않 은 대 형 의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 아직 상당수 남아 있는
점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금관은
마립간과 그의 일족이 썼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지금까지 드러난 연구결과에 따르면, 금관이
나온 무덤 중 금관총과 서봉총, 황남대총 북분의
주인은 모두 여성의 신분일 가능성이 많다.
금관총 금관은 관테 위에 3개의 맞가지모양
세움장식과 2개의 엇가지모양 세움장식을 덧붙인
전형적인 신라 금관이다. 금관의 제작 시기는
나뭇가지 모양 세움장식의 곁가지가 3단을 이루는 점,
‘出’ 자 모양 곁가지의 꺾임 각도, 테두리에 한 줄의
연속점무늬를 타출(打出)된 점 등에서 5세기대에
해당한다. 이는 황남대총 북분 금관, 서봉총 금관과
비교해 제작 연대와 방법이 유사하다.
금관총 금관의 두드러진 특징을 든다면 금관의
양쪽에 매단 드리개의 제작방법일 것이다. 드리개는 금사를 사슬처럼 꼬아서 만들었으며, 영락(瓔珞)은 금고리를
붙여서 만든 우산 모양의 장식체에다 매달았다. 드림은 금캡슐을 씌운 곡옥을 매달았는데, 이것은 흔하지 않은
사례이다. 특히 금캡슐에는 얼굴 모양이 그려져 있기 때문에 곡옥의 상징성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로
보기도 한다. 즉 종래 곡옥은 외형적 특징에 착안하여 태아나 생명을 상징한다는 주장이 줄곧 있어 왔으나, 최근에는
금캡슐에 그려진 얼굴이 용(龍)이라는 견해가 생겨났다.
『삼국사기(三國史記)』 탈해니사금 조에는 김씨 마립간의 시조인 알지(閼智)에 대한 신화가 기록되어 있다. 서기 65년
봄 3월, 탈해가 밤에 금성 서쪽 시림(始林)의 숲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는 아침에 호공을 보내 살펴보도록
하였는데, 그 장소에는 나뭇가지에 금빛이 나는 작은 궤짝이 걸려 있었고, 그 아래에 흰 닭이 울고 있었다. 탈해는
궤짝 안에 들어있던 자태와 용모가 뛰어난 사내아이를 거두어 길렀는데, 그 아이의 이름은 알지였고, 성은 금빛이
나는 궤짝에서 나왔기 때문에 김(金)이었다.
석 씨 니사금 가문의 후원으로 성장한 김 씨 가문은 알지의 7대손인 미추에 이르러 니사금을 배출하였으며(262년),
그 후 미추의 일족 내물은 마립간이 되어(356년) 마침내 김 씨 세습의 길을 열었다. 김 씨 마립간은 큰 무덤과 황금으로
통치기반을 확립하였으며, 고대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금관은 김 씨 마립간의 황금숭배와 시조 알지의 탄생설화 배경을 잘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금관의 외형은 마치
알지가 태어난 시림(始林)과 궤짝이 걸려있었던 나뭇가지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어쩌면 나뭇가지에 매달린 곡옥은
하늘이 보낸 초월적인 존재인 마립간 또는 그의 일족을 상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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