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경주에는 문화재관리국의 주도하에 고도개발사업(古都開發事業)이
추진되고 있었다. 문화재관리국은 미추왕릉지구에 고분공원[大陵苑]을 조성하고,
관광자원을 개발하기 위해 신라 고분을 발굴하기로 하였다. 먼저 1973년 4월
중형 크기에 해당하는 황남동 155호분(천마총)을 조사하여 신라 무덤에 대한
조사경험을 쌓은 뒤, 그 해 7월에는 대형 크기에 해당하는 98호분(황남대총)의
발굴을 시작하였다. 이 때 대릉원 주변에 있던 중소형 크기의 무덤들은 각
대학박물관과 경주박물관이 조사하였다.
황남동 155호 무덤은 지름 47m, 높이 13m에 달하는 돔 모양의 구릉으로
만들어졌는데, 여기에는 100여 명의 사람이 90여 일 동안 쌓아야 하는 막대한
양의 돌과 흙이 사용되었다.
1973년 6월, 봉토(封土)를 7m가량 걷어내자 지름 23m, 높이 6m 크기의 대규모 돌무더기가 드러났다. 돌무더기의
중앙 부분은 목관과 부장품을 감싸고 있던 나무 시설물[木槨]이 붕괴되면서 내려앉은 돌과 흙 때문에 푹 꺼져 있었다.
이렇게 많은 양의 흙과 돌이 신라 왕족의 무덤을 덮고 있었기 때문에 도굴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다.
돌무더기 속에는 목관과 금은보화만을 따로 넣은 나무 상자(부장궤)가 있었다. 목관 안에는 왕족이 머리에 금관을
쓰고, 귀에 금귀걸이를 하고, 가슴에 구슬을 늘어뜨리고, 허리에는 금허리띠와 장식대도를 착용한 채 누워 있었다.
나무 상자 안에는 무덤의 주인공이 저승에서 누릴 부귀영화를 위해 채워둔 금은보화가 가득하였다.
나무 상자 안에 들어있는 부장품 중에서 많은 주목을 끈 것 중의 하나는 바로 대나무와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두
장의 말다래였다. 여기에 그려진 하얀 동물은 너무나도 생동감이 넘쳐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또
말다래 근처에는 말을 부릴 때 쓰는 각종 마구와 말을 그린 그림판이 함께 들어 있었다. 발굴자들은 이 무덤을 신라 천
년의 숨결이 고스란히 담긴 세기의 발견을 기리고자 ‘천마총(天馬?)’으로 이름 지었다.
천마도(국보 207호)는 지금까지 남아있는 신라의 채색 그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그림은 붉은색으로 채운
그림판의 중앙에 흰색으로 한 마리의 말을 힘차고 두드러지게 그린 것이다. 백마는 입에서 신성한 기운을 내뱉고,
목줄기와 꼬리에 갈기를 휘날리면서 달리며 마치 현세에서 부귀영화를 누린 신라 왕족이 가는 극락세계로의 긴
여행을 재촉하는 듯하다.
무덤의 주인이 쓴 금관은 신라 금관(金冠)의 화려함을 잘 표현한 걸작 중의 하나이다. 신라 금관은 보통 둥근
테[臺輪]에 3개의 나뭇가지 모양 세움장식[出字形立飾]과 2개의 사슴뿔 모양 세움장식[鹿角形立飾]을 세운 뒤,
곱은옥[曲玉]과 달개[瓔珞]로 가득 장식한다. 둥근 테와 세움
장 식 판 에 는 가 장 자 리 를 따 라 점열무늬[ 點列文] 와
파상무늬[波狀文]를 장식하여 화려함을 더한다. 또 관을
착용했을 때 양쪽 볼에 해당하는 부위의 둥근 테 지점에는
드리개[垂下飾]를 매단다. 이렇게 신라 금관들은 서로
공통된 의장을 공유하나, 착용한 사람의 성별과 사회적
위치 등에 따라 세부적인 면에서 조금씩 다른 형태를
보인다.
현재까지 알려진 금관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경주시 교동(校洞)의 어느 무덤에서 도굴되었다가 1972년에
되찾은 금관이다. 이 금관은 5세기 신라 금관의 표준인
‘出’자 모양 금관이 완성되기 이전의 것이며, 크기가 작아
어린아이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래서 나뭇가지 모양
세움장식이 ‘出’자가 아니라 ‘V’자 모양에 가깝고, 곁가지의
단도 3단이 아닌 1단으로 만들어졌다.
이후 정형화된 ‘出’자 모양 금관으로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황남대총 북분 금관이다. 이 금관은 지금까지 출토된
것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금관에 매단 드리개가 세
쌍이라는 점 등에서 왕비에 대한 최상의 예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천마총 금관은 황남대총 북분 금관의 계보를 잇고 있어 제작방식이나 모양에서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이 금관은
6세기 전엽에 제작되어 나뭇가지 모양 세움장식의 곁가지가 한 단이 더 늘어나 4단을 이루고 있다. 또 ‘出’자 모양
곁가지의 꺾임 각도가 거의 90°를 이루고, 테두리에는 두 줄의 연속점무늬를 타출(打出)시켜서 더욱 돋보이게 만든
점이 차이가 난다.
금관의 양 쪽에는 한 쌍의 드리개를 붙였으며, 드리개의 중심고리는 가는고리[細?]로 만들었다. 중심고리 아래에는
귀걸이 모양과 같이 짧은 딸림꾸미개와 이와 반대로 길게 드리운 으뜸꾸미개를 매달았다. 으뜸꾸미개의
샛장식[中間飾]은 여느 금관과 마찬가지로 양쪽에 고리가 있는 아령 모양의 몸체 여러 조를 연결하여 만든 것이며,
여기에 달개가 달린 금사 여러 개를 코일처럼 꼬아서 붙였다. 샛장식의 끝은 펜촉 모양의 드림[垂下飾]으로
완성하였다.
천마총 금관은 금 83.5%로 약 20k에 해당하여 신라의 마립간이나 그의 일족이 착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이보다 낮은 신분의 귀족이나 지방 세력은 금동관을 썼다. 특히 마립간은 지방의 세력가들에게 적절히 금동관을
하사하여 그들을 회유하거나 견제하는 방법으로 신라의 중앙집권체제 아래에 두려고 하였다. 그래서 금관은 고총과
화려한 위세품으로 통치기반을 확립해나가던 ‘마립간’ 시기 즉 5세기대에 가장 화려하고, 불교가 국가의 이념으로
정착하기 시작하는 6세기 이후부터는 점차 퇴화하면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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