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자리한 국보 86호 경천사(敬天寺) 십층석탑(十層石塔)은 높이가
약 13.5m에 이르는
웅장한 규모의 석탑으로, 석탑 전체에 불, 보살, 사천왕, 나한, 그리고 불교 설화적인 내용이 층층이 가득
조각되어 있다. 이는 불교의 주요 존상들을 한자리에 표현한 것으로 고려시대 사람들이 생각한 부처의
세계를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경천사 석탑은 1348년(충목왕忠穆王 4년) 건립되었으며, 경기도 개풍군
(開豊郡) 광덕면(光德面) 중연리(中蓮里) 부소산(扶蘇山)에 위치해 있었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경천사는 고려 왕실이 종종 추모제를 지냈으며 왕실과의 왕래가 잦았던 사찰이다. 사찰이 폐사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며, 20세기 초에는 사지에 석탑만 남아 있었다. 석탑의 1층 탑신석 상방에는 건립 연대와
발원자, 조성배경 등을 알려주는 명문이 남아있다. 명문에 따르면 석탑은 대화엄(大華嚴) 경천사에서
1348년 3월 조성되었고, 발원자는 대시주(大施主) 중대광(重大匡) 진녕부원군(晉寧府院君) 강융(姜融),
대시주 원사(院使) 고룡봉(高龍鳳), 대화주(大化主) 성공(省空), 시주(施主) 법산인(法山人) 육이(六怡)
였다. 이들은 왕실의 안녕과 국태민안을 기원하고 불법이 빛나고 석탑 건립의 공덕으로 일체 중생이 모두
성불하게 되기를 기원하였다. 강융은 원래는 관노(官奴) 출신이었으나 충선왕(忠宣王)의 측근이 되어 공을
세운 인물이며, 그의 딸은 원(元)의 승상 탈탈(脫脫)의 애첩이 되었다. 고룡봉은 고려 환관으로 원에 가서
황제의 신임을 얻어 출세한 인물이다. 그는 충혜왕(忠惠王)대에 공녀로 원에 간 기자오(奇子敖)의 딸이자
기철(奇轍)의 여동생을 원의 황제인 순제(順帝)에게 선보여 황후에 오르게 한 인물이다. 자정원사
(資政院使)로 봉해졌는데 자정원(資政院)은 기황후의 부속관청이었기에, 그는 고려에서도 권세를 누렸다.
이처럼 석탑 건립의 배경을 살펴보면 친원 세력이 주도적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경천사 석탑의 형태는 기존의 간결한 전통적인 석탑의 외형과는 매우 다르다. 석탑의 기단부와 탑신석
1층에서 3층까지의 평면은 소위 한자의 아(亞)자와 같은 형태로, 사면이 돌출되어 있다. 이러한 평면은
원대에 유행한 몽골·티베트계 불교 사찰의 불탑 기단부나 불상 대좌 형태와 유사하다. 반면 탑신부 4층부터
10층까지의 평면은 방형 평면으로, 경천사 석탑은 전통적인 요소와 외래적 요소의 조화 속에 탄생한 이형
석탑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경천사에 관한 몇몇 조선시대 문헌 기록에는 원의 승상 탈탈이 경천사를
원찰로 삼고 강융이 원에서 공장(工匠)을 뽑아 탑을 만들었다고 전하며, 당시에도 승상 탈탈과 강융의
초상화가 남아있었다고 기록했다. 후대의 기록이기는 하지만, 발원자의 성향이나 석탑의 형태로 미루어 볼
때 이국적인 요소가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해 보인다.
경천사 석탑에는 목조건축의 기둥과 공포, 난간과 현판, 기와까지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어 석탑을 통해
고려시대 목조건축을 상상해볼 수 있다. 그러나 경천사 석탑의 백미는 역시 석탑 전체에 섬세하게 조각
되어 있는 불보살의 모습이다. 전체 구성을 살펴보면 기단부에는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존재들, 즉 밑에서
부터 사자, 용, 연꽃, 소설 『서유기(西遊記)』의 장면, 그리고 나한들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1층부터
4층까지의 탑신부에는 부처의 법회장면, 즉 불회(佛會) 장면이 총 16장면으로 새겨져 있고 그 사이사이
불교 존상들이 새겨져 있으며, 5층부터 10층까지는 선정인 또는 합장을 한 불좌상이 새겨져 있다. 이는
불교의 존상들을 불교적 위계에 따라 층층이 표현한 것이다.
기단부에 새겨진 『서유기』는 송대에 이미 설화가 된 중국 당대(唐代) 승려 현장(玄奘)의 인도로의
구법행이 명대에 소설로 간행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기단부 부조 20장면을 살펴보면 이미 원대에 명대
『서유기』에 사용되었던 판화와 유사한 장면이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서유기』 장면은 이를
바라보는 불자들에게는 현장의 구법행을 통해 공덕과 깨달음에 대한 불교적인 교훈을 전하고, 『서유기』
의 등장인물들로 하여금 내부에 안치된 사리를 수호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기단부에 새겨졌다고 추정된다.
탑신부의 조각은 1층부터 3층까지의 불회(佛會) 장면만을 일컬어 12회(會)라고 하기도 하고, 때로는 4층의
불회 장면을 포함하여 16회로 보기도 한다. 불회 장면 위에는 현판 모양에 각 불회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는데, 1층에는 삼세불회·영산회·용화회·미타회, 2층에는 화엄회· 원각회·법화회·다보불회, 3층에는 소재회
·전단서상회·능엄회·약사회, 4층에는 원통회·지장회·열반회·석가회 등이 있다. 이러한 부조의 조성
배경으로는 여러 견해가 제기되었다. 우리 전통 불교와 관계 깊은 경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기도 하고,
층별로 도상의 특징을 구분하여 1층은 우리나라 불교 신앙을, 2층은 사상을, 3층은 밀교 관련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사방불회로 추정하기도 하고 1층 남면의 삼세불회에 주목하여 새로운 개념의 삼불 도상이
출현한 것에서 도상적인 의의를 찾는 연구도 있다.
경천사 석탑의 정교한 조각 표현이 가능했던 이유는 경천사 석탑이 전통적인 불상이나 석탑의 재질인
화강암이 아니라 조형 작업이 쉬운 무른 재질의 대리석이기 때문이다. 경천사 석탑이 건립된 뒤 약 120여
년이 흐른 후, 조선 왕실 발원으로 만들어진 원각사지(圓覺寺址) 십층석탑에는 경천사 석탑의 형태와
도상이 그대로 재현되기도 하였다.
경천사 석탑은 한국 문화재 수난사를 대표하는 문화재이기도 하다. 1907년 순종의 가례에 일본 특사로 온
궁내대신 다나카 미스아키(田中光顯)가 석탑의 무단반출을 시도했다. 당시 주민들이 이를 저지했으나
헌병들이 총칼로 위협하여 수레로 부재들을 반출하였고, 다시 군수가 이를 제지 했지만 결국 한밤중에
밀반출되었다. 석탑 반출은 즉시 문제가 되어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는 10여 차례 이상의
기사와 논설이 게재되어 석탑 반출의 불법성을 알렸다. 석탑 반환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월간지 Korea
Review의 발행인 미국인 헐버트(Homer B. Hulbert)와 「대한매일신보」와 Korea Daily News의 발행인인
영국인 베델(Ernest T. Bethell)의 지속적인 기고 덕분이었다. 특히 베델은 일본의 영자 신문과, New York
Post에도 불법 약탈을 알렸으며,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로 파견되었을 때도 현지 신문에 석탑
밀반출을 폭로하였다. 결국 계속된 반환 여론 조성에 1918년 11월 15일 석탑은 국내로 돌아오게 되어
1919년 박물관에 귀속되었다.
국내에 반환된 경천사 석탑은 당시 기술로는 재건립이 어려웠기에 1960년까지 경복궁 회랑에 보관되었다.
1960년 국립박물관의 주도하에 경천사 십층석탑의 훼손된 부재가 수리되어 경복궁에 세워졌고, 1962년
국보 86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정밀한 보존처리가 요구되었기에 1995년 석탑은 다시 해체되었고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약 10여 년에 걸쳐 보존처리되었다. 이후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의 용산 재개관
시 국립중앙박물관 측이 현재의 전시실에 이전 복원 건립함으로써 100여 년 만에야 비로소 경천사 석탑이
그 웅장한 위용을 다시 드러내게 되었다.
웅장한 규모의 석탑으로, 석탑 전체에 불, 보살, 사천왕, 나한, 그리고 불교 설화적인 내용이 층층이 가득
조각되어 있다. 이는 불교의 주요 존상들을 한자리에 표현한 것으로 고려시대 사람들이 생각한 부처의
세계를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경천사 석탑은 1348년(충목왕忠穆王 4년) 건립되었으며, 경기도 개풍군
(開豊郡) 광덕면(光德面) 중연리(中蓮里) 부소산(扶蘇山)에 위치해 있었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경천사는 고려 왕실이 종종 추모제를 지냈으며 왕실과의 왕래가 잦았던 사찰이다. 사찰이 폐사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며, 20세기 초에는 사지에 석탑만 남아 있었다. 석탑의 1층 탑신석 상방에는 건립 연대와
발원자, 조성배경 등을 알려주는 명문이 남아있다. 명문에 따르면 석탑은 대화엄(大華嚴) 경천사에서
1348년 3월 조성되었고, 발원자는 대시주(大施主) 중대광(重大匡) 진녕부원군(晉寧府院君) 강융(姜融),
대시주 원사(院使) 고룡봉(高龍鳳), 대화주(大化主) 성공(省空), 시주(施主) 법산인(法山人) 육이(六怡)
였다. 이들은 왕실의 안녕과 국태민안을 기원하고 불법이 빛나고 석탑 건립의 공덕으로 일체 중생이 모두
성불하게 되기를 기원하였다. 강융은 원래는 관노(官奴) 출신이었으나 충선왕(忠宣王)의 측근이 되어 공을
세운 인물이며, 그의 딸은 원(元)의 승상 탈탈(脫脫)의 애첩이 되었다. 고룡봉은 고려 환관으로 원에 가서
황제의 신임을 얻어 출세한 인물이다. 그는 충혜왕(忠惠王)대에 공녀로 원에 간 기자오(奇子敖)의 딸이자
기철(奇轍)의 여동생을 원의 황제인 순제(順帝)에게 선보여 황후에 오르게 한 인물이다. 자정원사
(資政院使)로 봉해졌는데 자정원(資政院)은 기황후의 부속관청이었기에, 그는 고려에서도 권세를 누렸다.
이처럼 석탑 건립의 배경을 살펴보면 친원 세력이 주도적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경천사 석탑의 형태는 기존의 간결한 전통적인 석탑의 외형과는 매우 다르다. 석탑의 기단부와 탑신석
1층에서 3층까지의 평면은 소위 한자의 아(亞)자와 같은 형태로, 사면이 돌출되어 있다. 이러한 평면은
원대에 유행한 몽골·티베트계 불교 사찰의 불탑 기단부나 불상 대좌 형태와 유사하다. 반면 탑신부 4층부터
10층까지의 평면은 방형 평면으로, 경천사 석탑은 전통적인 요소와 외래적 요소의 조화 속에 탄생한 이형
석탑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경천사에 관한 몇몇 조선시대 문헌 기록에는 원의 승상 탈탈이 경천사를
원찰로 삼고 강융이 원에서 공장(工匠)을 뽑아 탑을 만들었다고 전하며, 당시에도 승상 탈탈과 강융의
초상화가 남아있었다고 기록했다. 후대의 기록이기는 하지만, 발원자의 성향이나 석탑의 형태로 미루어 볼
때 이국적인 요소가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해 보인다.
경천사 석탑에는 목조건축의 기둥과 공포, 난간과 현판, 기와까지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어 석탑을 통해
고려시대 목조건축을 상상해볼 수 있다. 그러나 경천사 석탑의 백미는 역시 석탑 전체에 섬세하게 조각
되어 있는 불보살의 모습이다. 전체 구성을 살펴보면 기단부에는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존재들, 즉 밑에서
부터 사자, 용, 연꽃, 소설 『서유기(西遊記)』의 장면, 그리고 나한들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1층부터
4층까지의 탑신부에는 부처의 법회장면, 즉 불회(佛會) 장면이 총 16장면으로 새겨져 있고 그 사이사이
불교 존상들이 새겨져 있으며, 5층부터 10층까지는 선정인 또는 합장을 한 불좌상이 새겨져 있다. 이는
불교의 존상들을 불교적 위계에 따라 층층이 표현한 것이다.
기단부에 새겨진 『서유기』는 송대에 이미 설화가 된 중국 당대(唐代) 승려 현장(玄奘)의 인도로의
구법행이 명대에 소설로 간행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기단부 부조 20장면을 살펴보면 이미 원대에 명대
『서유기』에 사용되었던 판화와 유사한 장면이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서유기』 장면은 이를
바라보는 불자들에게는 현장의 구법행을 통해 공덕과 깨달음에 대한 불교적인 교훈을 전하고, 『서유기』
의 등장인물들로 하여금 내부에 안치된 사리를 수호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기단부에 새겨졌다고 추정된다.
탑신부의 조각은 1층부터 3층까지의 불회(佛會) 장면만을 일컬어 12회(會)라고 하기도 하고, 때로는 4층의
불회 장면을 포함하여 16회로 보기도 한다. 불회 장면 위에는 현판 모양에 각 불회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는데, 1층에는 삼세불회·영산회·용화회·미타회, 2층에는 화엄회· 원각회·법화회·다보불회, 3층에는 소재회
·전단서상회·능엄회·약사회, 4층에는 원통회·지장회·열반회·석가회 등이 있다. 이러한 부조의 조성
배경으로는 여러 견해가 제기되었다. 우리 전통 불교와 관계 깊은 경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기도 하고,
층별로 도상의 특징을 구분하여 1층은 우리나라 불교 신앙을, 2층은 사상을, 3층은 밀교 관련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사방불회로 추정하기도 하고 1층 남면의 삼세불회에 주목하여 새로운 개념의 삼불 도상이
출현한 것에서 도상적인 의의를 찾는 연구도 있다.
경천사 석탑의 정교한 조각 표현이 가능했던 이유는 경천사 석탑이 전통적인 불상이나 석탑의 재질인
화강암이 아니라 조형 작업이 쉬운 무른 재질의 대리석이기 때문이다. 경천사 석탑이 건립된 뒤 약 120여
년이 흐른 후, 조선 왕실 발원으로 만들어진 원각사지(圓覺寺址) 십층석탑에는 경천사 석탑의 형태와
도상이 그대로 재현되기도 하였다.
경천사 석탑은 한국 문화재 수난사를 대표하는 문화재이기도 하다. 1907년 순종의 가례에 일본 특사로 온
궁내대신 다나카 미스아키(田中光顯)가 석탑의 무단반출을 시도했다. 당시 주민들이 이를 저지했으나
헌병들이 총칼로 위협하여 수레로 부재들을 반출하였고, 다시 군수가 이를 제지 했지만 결국 한밤중에
밀반출되었다. 석탑 반출은 즉시 문제가 되어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는 10여 차례 이상의
기사와 논설이 게재되어 석탑 반출의 불법성을 알렸다. 석탑 반환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월간지 Korea
Review의 발행인 미국인 헐버트(Homer B. Hulbert)와 「대한매일신보」와 Korea Daily News의 발행인인
영국인 베델(Ernest T. Bethell)의 지속적인 기고 덕분이었다. 특히 베델은 일본의 영자 신문과, New York
Post에도 불법 약탈을 알렸으며,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로 파견되었을 때도 현지 신문에 석탑
밀반출을 폭로하였다. 결국 계속된 반환 여론 조성에 1918년 11월 15일 석탑은 국내로 돌아오게 되어
1919년 박물관에 귀속되었다.
국내에 반환된 경천사 석탑은 당시 기술로는 재건립이 어려웠기에 1960년까지 경복궁 회랑에 보관되었다.
1960년 국립박물관의 주도하에 경천사 십층석탑의 훼손된 부재가 수리되어 경복궁에 세워졌고, 1962년
국보 86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정밀한 보존처리가 요구되었기에 1995년 석탑은 다시 해체되었고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약 10여 년에 걸쳐 보존처리되었다. 이후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의 용산 재개관
시 국립중앙박물관 측이 현재의 전시실에 이전 복원 건립함으로써 100여 년 만에야 비로소 경천사 석탑이
그 웅장한 위용을 다시 드러내게 되었다.
출처 : 우표취미생활인의 교양지 월간 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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