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수집한 우표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우표를 꼽으라면 단연 1992년 10월 발행된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 선수의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제패’ 기념우표다. 당시 일본의 모리시타 고이치 선수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선두 그룹에서 달리던 황 선수는 난코스로 알려진 몬주익 언덕에서 스퍼트하며 1위로 골인했다. 석양이 지던 올림픽 주경기장에 들어서던 황 선수의 모습, 그리고 골인하면서 두 손 들어 만세 하던 장면은 28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기념우표에는 황 선수의 골인 장면이 담겼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장기를 달고 우승한 손기정 선수 이후, 한국의 올림픽 마라톤 우승은 처음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날짜가 56년 전과 같은 8월 9일이었다. 손기정옹(2002년 작고)은 바르셀로나에서 마라톤을 본 뒤 언론 인터뷰에서 “황영조가 내 국적을 찾아 들어온 날 같았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당시 기념우표에는 황 선수의 우표와 함께 손기정옹의 골인 장면이 담긴 우표가 세트로 발행됐다.
많은 이들을 울고 웃게 만든 한국 스포츠의 역사는 우표만 봐도 알 수 있다. 1988년과 2018년 하·동계 올림픽과 패럴림픽 기념우표, 2002년 한·일 월드컵 및 4강 기념우표, 2011년 대구세계육상선수권 대회와 2019년 광주 세계수영선수권 대회 기념우표 등 세계적 스포츠 대회가 한국에서 열릴 때마다 우표가 발행됐다. 1920년 7월 조선체육회(대한체육회 전신)가 출범해 야구·축구·정구 등으로 시작한 한국 스포츠가 눈부시게 성장한 셈이다.
우정사업본부가 최근 선보인 대한체육회 창립 100주년 기념우표는 이런 스포츠 역사의 정점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우표가 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빛바랜 우표가 됐다.
우린 너무 많은 것을 놓치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100년을 축하하는 동안 전 소속팀 감독과 팀닥터, 다른 선수들의 폭행과 폭언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철인’ 최숙현 선수는 “그 사람들 죄를 밝혀달라”고 했다. 고인은 용기를 내 이들의 폭행 등을 고발하고 대한체육회 스포츠인권센터 등에 피해 신고를 했지만 도움을 받지 못했다. 대한체육회는 사건 발생 직후 어떤 입장 발표도 없다가 사건이 널리 알려진 지난 7월 1일에서야 “조속하고 엄중한 조처를 하겠다”고 말했다. 이기흥 대한체육회장 등 체육계 고위급 인사들은 최 선수 발인 직후인 6월 30일 자선 골프대회에 참석해 시타하는 모습을 보여 질타를 받았다.
얼마 전 우표수집 인터넷 카페에 들어갔다가 누군가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얼굴이 새겨진 영광의 메달리스트 기념우표를 좋아한다”고 밝힌 게시글을 봤다. 편지를 부칠 때 그 기념우표를 사용했지만 가장 좋아하는 선수가 담긴 우표는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바로 쇼트트랙의 심석희 선수 우표다. 그는 조재범 코치가 4년간 상습적으로 성폭행을 했다며 용기를 내 폭로하기도 했다. 이후 스포츠계 ‘미투’가 이어졌다. 청원도 이어졌고, 청와대도 재발 방지 대책을 세우겠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미적대는 동안 또 다른 피해자가 생겼다. 사죄하는 방법은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하고 재발을 막는 일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국가’·‘금메달’·‘엘리트’만을 강조하며 그들이 만들어낸 스토리에 울고 웃기만 하다가 정작 더 중요한 것을 놓쳐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