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8일은 무슨 날? 이렇게 물으면 누가 제대로 답할 수 있을까. 달력에 아무 기념일 표시도 없으니 모르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이날은 한국 우정 역사에 의미있는 날이다. 최초의 우정관청이자 우체국인 우정총국이 업무를 시작한 날이 바로 이날이다. 이 땅에서 근대우정이 처음 시행된 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정인은 기억에 새길 법하지 않은가.
여기까지 듣고난 우정인이 이렇게 반문할지 모르겠다. "아니 그렇게 역사적인 날을 우리가 왜 여지껏 모르고 있죠?"
이날이 잊혀진 것은 우정총국의 비운과 관계가 있다. 우정총국이 문을 연 것은 1884년 10월 1일, 양력으로 치면 11월 18일이다. 구한말에 들어온 서구의 첨단문명, 지금으로 치면 스마트폰쯤 되는 정보통신 수단이 제도화된 셈이니 정부 각료들 모두 감격에 겨웠을 것이다. 정부는 10월 17일(양력으로는 12월 4일) 우정총국 건물 완공을 축하하는 연회를 갖는다.
그런데 이 낙성식이 열리는 중 쿠데타가 일어난다. 급진 개화파들이 이날을 D데이로 삼아 갑신정변을 일으킨 것이다. 이 정변의 주역 중 한 명이 우정총국의 초대총판(지금의 장관격)인 금석(琴石) 홍영식(洪英植)이다.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끝나고 홍영식은 도륙(屠戮)의 형에 처해지면서 우정총국 또한 10월 21일 폐지되고 만다. 우정총국의 공식 수명은 고작 20일밖에 안되는 것이다.
우정총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건물의 형상은 훗날 새로 지었지만 장소만큼은 서울 종로구 견지동 옛날 그 자리에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길이 없다.
당시 우정총국의 업무는 한성~인천에 국한돼 있었다. 우편물이 오가려면 부치는 곳과 받아서 배달하는 곳에 각각 우체국이 있어야 하지만, 우정총국 외에 우체국은 인천에만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의 인천 분국장이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라는 기록은 있다. 하지만 우정총국 20일간의 업무 기록이 없다. 정부기구인 만큼 기록이 분명 있었을 텐데,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 없다. 갑신정변의 와중에 불에 탔거나, 기관이 폐쇄되면서 문서 또한 폐기처분된 것 아닐까 추정할 뿐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이 땅의 최초 우편물, 역사적 테이프를 끊은 첫 편지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지 못한다. 누가 누구에게 보냈으며, 어느 배달부가 어떤 방식으로 전달했는지도 모른다. 20일간 편지는 얼마나 오갔으며, 한국 최초의 문위우표는 얼마나 팔렸는지와 같은 우정 초기의 역사를 알 방도가 없다. 우정총국 탄생일에 관한 기억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것이다.
낙성식이 열린 12월 4일은 한동안 기념되기도 했다. 1956년부터 72년까지 16년 동안 이날을 ‘체신의 날’로 정해 전국의 우정인들이 자축 떡을 돌려먹곤 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날은 우정의 생일이 아니라 제삿날이다. 쿠데타의 여파로 우정의 주역들이 줄줄이 목이 달아났고, 제도는 옛날 역참제로 되돌아갔다. 1895년 근대우정이 재개되기까지 꼬박 10년간 우정 암흑기를 맞아야 했다. 그렇다면 생일을 놔두고 왜 하필 제삿날을 기념하느냐 하는 이의가 나올 법하다. 당시 체신부는 갑신정변이 널리 알려진 만큼 이날을 기념일로 잡아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를 폈다고 한다.
기념일에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올 초에 타계한 우정사학자 진기홍씨다. 당시 서울중앙전신국장이던 그는 “체신의 날은 11월 18일이 되어야 한다”고 상부에 수차 건의했다. 그래서 체신부가 체신의 날 개정과 관련한 간부회의를 열었는데 11월 18일도, 12월 4일도 아닌 4월 22일로 결정했다. 이날은 우정총국의 개설을 명한 고종의 칙령이 내려진 날로, 이게 더 의미있다고 본 것이다(정보통신역사기행·이기열). 그래서 1973년부터 체신의 날은 4월 22일로 바뀌었고, 1995년 체신부가 정보통신부로 바뀌면서 기념일의 명칭도 ‘정보통신의 날’로 바뀌었다. 정통부가 없어지고 우정사업본부는 지식경제부 소속이 되었지만 기념일 행사는 방통통신위원회와 공동 주관하고 있다. 이래저래 11월 18일의 기억은 살아날 계기를 얻지 못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