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받습니다. 아이를 시골 할머니 댁에 보내야 하는데 데리고 갈 사람이 없다고요? 그럼 아이를 우편물로 부치세요. 우리 우체국은 사람도 배달합니다.’
요즘 세상에 이런 광고문구가 있다면 “대체 무슨 말도 안되는 흰 소리인가” 하며 일축할 것이다. 하지만 때와 장소가 1900년대 초 미국이라면 사정은 다르다. 우체국에서 실제 그런 광고를 했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정황으로 보면 전혀 터무니없는 이야기만은 아니다.
당시 미국은 영국에서 막 도입해온 우편이라는 신문물에 문화적 충격을 받았던 때였다. 우편배달망을 통하면 무엇이든 싼 가격에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신기했다. 1913년 소포우편물이 선보이자 농부와 상인들은 새로운 기회의 장이 열렸다며 들떴고, 이는 미국 경제에 큰 활력소로 작용했다. 농촌사람들은 그 전까지 쉽게 접하기 어려웠던 의약품이나 가공식품 등을 우편을 통해 집에서 손에 넣을 수 있었고, 반대로 농장에서 생산하는 달걀과 버터 같은 농산물을 도시의 소비자들에게 소포로 보낼 수 있게 됐다. 어느 쪽이든 시간과 비용은 크게 절약됐다.
이렇게 되자 농촌사람의 생각은 한걸음 더 나아갔다. 동물을 우편으로 보낼 수는 없을까. 달걀과 버터만 보내던 사람들이 집에서 키우던 가금류를 우체국으로 가져가 보았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소포로 받아준다고 했다. 열차를 바꿔 태울 때 음식이나 물을 별도로 주지 않아도 되는 작은 동물, 예를 들면 병아리 같은 동물은 배달해준다는 것이다. 병아리는 삐약삐약 하는 소리에 시끄럽고 냄새 나는 데다 조금만 잘못 다루면 죽어버리기 때문에 집배원들이 무척 싫어했지만 특수제작된 박스에 싸서 소포우편물로 보내지는 일이 흔했다.
이를 보고 일부 사람들이 기막힌 아이디어를 냈다. ‘사람도 동물 아닌가, 사람을 우편물로 보내자’고 생각한 것이다. 땅덩어리는 넓고 교통수단은 부족하던 때였으니 무릎을 탁 칠만한 아이디어였다. 그때까지 미국 법령에 사람은 우편물이 될 수 없다는 따위의 금지규정이 없었다
1914년 미국 중부 아이다호의 소도시 그랑빌에 사는 한 농부가 이를 실천에 옮겼다. 네 살난 딸을 같은 주(州)내 반대편 도시에 사는 할머니 집에 보내야 하는데 데려갈 사람이 없자 궁리 끝에 우편으로 부친 것이다. 이때 농부가 지불한 우편요금은 달걀 보낼 때 드는 비용 53센트에 불과했다.
미주리주 남서부 스프링필드에서는 더 큰 어린이, 그것도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을 소포로 배달했 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스프링필드 지역신문 1918년 9월 3일자 기사에 따르면 레드 탑이라는 곳에 사는 7살의 조세핀 매콜, 8살의 아이리스 카터 두 여자 어린이가 숙모가 사는 스프링필드 노스 캠벨 스트리트 1221번가에 소포로 배달됐다. 아이들은 다른 우편물과 함께 우편용 트럭에 실려서 운송됐다. 이 트럭에 실리는 모든 물품은 무게를 달고 스탬프를 찍고 기록해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다. 아이들도 이 규칙에 따라 무게를 달아 7살짜리 아이는 52센트, 8살짜리는 70센트, 합계 1달러23센트의 요금이 매겨졌다. 그리고 아이들 몸에 스탬프가 찍혀졌다.
배달은 W E 포셋이라는 트럭 운전사가 맡았다. 그는 레드 탑에서 다른 우편물과 함께 두 아이를 태우고 스프링필드로 향했고, 그곳에서 ‘수취인’에게 두 아이를 정확하게 배달했다. 포셋은 사람을 배달해보는 색다른 경험에 기분이 괜찮았으나 다른 부모들도 너도 나도 아이를 부쳐 인간 소포가 너무 많으면 어떻게 감당하나 하는 걱정도 함께 했다고 이 신문은 전하고 있다.
인간 우편물이라고는 하나 사실 트럭 타고 유람가는 것과 비슷했다. 안전상의 위험도 없었고, 발송의 비용도 비교적 저렴했다. 그러니 다른 부모들도 따라 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이 때문에 미 우정국은 곳곳에서 사람을 우편으로 실어날랐다는 보도가 잇따르자 우편물이 될 수 없는 목록에 사람을 명시해 공식적으로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엽기적인, 아니 어떤 면에서는 사람 냄새 물씬 난다고도 할 수 있는 인간소포의 역사는 그렇게 끝이 났다. 미 우정박물관은 단명으로 끝난 이 독특한 배달사를 지금도 흥미롭게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