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8월 20일 홍콩 주둔 영국군 27여단 장교들이 고급 클럽에서 파티를 열고 있었다. 흥겹게 술잔을 부딪히는데 본국에서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고 돌아온 장교가 보고했다. “곧바로 한국으로 이동하라는데요.” 좌중에서 한국이 어딘지 아는 사람은 우표수집하는 장교 한 명뿐이었다. 나머지는 얼떨떨했다. 누군가가 물었다. “한국에서도 운동할 기회가 많을까요? 골프 클럽을 가져갈지 고민되네요.” 상급자가 답했다. “말이라고 하나? 당연히 가져가야지.”
영국 더 타임스지 서울특파원 앤드루 새먼(45)이 6·25전쟁에 참전한 영국·호주·미국군 등 90명을 인터뷰해 쓴 책 ‘검은 눈(雪)이 내린 땅’(Scorched Earth, Black Snow)에 나오는 내용이다(6월 2일 조선일보). 그때까지 영국 군인들은 한국이란 나라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얘기다.
우정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한국이 어딘지 아는 사람은 우표수집하는 장교 한 명뿐이었다”는 대목이다. “우표에서 배운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많다”고 한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우표수집이 무엇보다 훌륭한 역사공부라는 그 말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준다.
6·25전쟁이 있기 전까지 사실 한국은 그다지 세계적으로 알려진 나라가 아니었다. 21개 나라가 유엔의 깃발 아래 출진하면서 코리아는 국제적 관심권에 들어섰다. 이때 한국을 세계인의 뇌리에 각인시키는 데 기여한 게 우표와 우편이다. 참전국가 중 인도는 군사우표를, 미국·콜롬비아·터키·뉴질랜드·호주·캐나다 등은 6·25 참전 기념우표를 내 한국을 알렸다.
남의 나라 우표에 앞서 남북한이 발행한 것부터 보자.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북한이 남침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뒤 낸 우표다. 중앙청에 붉은 깃발이 매달려 있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서울해방기념’이라고 제목이 붙어 있다. 석 달 뒤 전세가 역전되자 정반대의 우표가 나왔다. 유엔군 참전으로 힘을 얻은 국군이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가자 한국 정부가 ‘국토통일기념우표’를 내놓은 것이다. 단기 4283년(1950년) 11월 10일 발행된 이 우표는 백두산 천지에 태극기가 나부끼는 모양, 한반도를 가운데 두고 태극기와 유엔기가 좌우에 있는 모양 등 세 종류다. 여기에 “이 우표는 역사적으로 의의깊은 국토통일을 기념하기 위해 발행하였다”는 체신부 안내문이 붙어 있다. 당시 남쪽 정부가 전쟁 상황을 그만큼 오판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1·4후퇴를 한 뒤 전선이 대치 중이던 1951년 10월 한국 역사상 최대이자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진기한 우표가 나왔다. 우리 정부가 21개 참전국가에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 오른쪽엔 태극기, 왼쪽엔 개별국가의 국기를 그리고, 가운데 자유의 여신상 사진을 넣은 한 벌 44종짜리 참전 기념우표를 낸 것이다. 이 우표는 1만벌밖에 안 찍었기 때문에 나오자마자 우표상의 수집 대상이 되는 등 인기를 끌었다.
항미원조(抗美援朝), 즉 ‘미국에 대항하여 북한을 돕는다’는 명분을 내걸고 한반도에 발을 들여놓은 중국도 전쟁의 와중인 1952년 우표를 발행했다. 전장터의 몇 가지 전형적인 장면사진 위에 ‘중국인민지원군 출국작전 2주년 기념’이라고 제목을 단 우표다.
외국에서 발행한 6·25 우표 중 가장 유명한 것은 1952년에 나온 터키 우표다. 길을 잃고 헤매는 아이를 터키 군인이 발견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때까지 돌봐주었다는 휴먼스토리가 터키 신문과 라이프 잡지에 보도되자 이 사진을 기념우표에 담은 것이다. 사진 속 주인공은 훗날 고려대를 졸업한 최민자씨로 신원이 밝혀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미국은 1985년 7월 한국전 참전 기념우표를 처음 낸 이후 96년 9월 인천상륙작전 46주년 기념, 97년 소양강 전투 46주년 기념우표를 발행했고, 2003년에는 휴전 50주년을 맞아 워싱턴 DC에 기념물을 제작한 뒤 이 사진을 우표로 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