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다시 찾은 경천사지 십층석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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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21. 3.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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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 신라시대의 석탑 양식을 이어 평면 사각형의 석탑 또는 새로운 양식의 다각(多角) 석탑이 나타난다. 이런 것과 달리 특수한 형태를 보이는 것이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開城 敬天寺址 十層石塔)이다.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부소산에 있던 경천사는 고려시대 전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절이나, 20세기 초에는 이미 폐사되어 석탑만 남아 있었다. 높이 13.5m의 경천사지 석탑은 탑신부(1~3층)가 아자형(亞字形)으로 사면이 돌출되고 기단(基壇)과 같은 평면이나,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좁아진다. 4층부터는 탑신이 정사각형 평면으로 각 층 몸돌마다 난간을 돌리고 옥개(屋蓋) 밑에는 다포집 양식의 두공(枓栱) 형태를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옆에서 보아 여덟 八(팔)자 모양인 팔작지붕 형태의 기왓골을 표현해 놓는 등 목조건축을 연상케 하는 풍부한 조각들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다. 기단과 탑신에는 부처, 보살, 인물군상, 사자, 용, 나한(羅漢), 풀꽃무늬 등이 빈틈없이 뛰어난 조각수법으로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 석탑은 대부분 부재(部材)가 화강암인 데 비해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는 점도 특이하다. 우아하고 변화가 풍부하며, 전체적인 균형과 세부적인 조각 수법이 잘 어우러진 아름다운 자태로 눈길을 끈다. 지붕돌의 처마가 목조건축의 구조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어 당시의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이러한 양식은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러 세조 때 만들어진 원각사지(圓覺寺址) 십층석탑(국보 제2호, 서울 종로 탑골공원, 높이 12m)에 영향을 주었다. 석탑 1층 옥신 이맛돌 조탑명문(造塔銘文)에 ‘至正八年’(지정8년)이라는 기록이 있어 탑의 건립 연대가 고려 충목왕(忠穆王) 4년(1348)임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정치적 환경으로 보아 원나라(元) 왕실과 가까운 권문 세력이 주도적 역할을 해 중국탑의 영향이 탑에 많이 반영되었다고 한다. 경천사 석탑이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석탑 자체가 한국 문화재 수난사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1907년 순종(純宗)의 가례에 일본 특사로 온 궁내부대신 田中光顯(다나카 미스야키)가 석탑을 한밤중에 해체·밀반출하였다. 석탑 반출은 즉시 문제가 되어 대한매일신보에는 10여 차례 이상의 기사와 논설이 게재되어 석탑 반출의 불법성을 알렸다. 석탑 반환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월간지 Korea Review의 발행인Homer B. Hulbert(미국)와 Korea Daily News,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인 Ernest T. Bethell(영국)의 지속적인 기고 덕분이었다. 특히 헐버트는 석탑의 불법 약탈을 일본의 영어 신문과 New York Post에 알렸으며,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로 파견되었을 때도 현지 신문에 폭로하였다. 결국 계속된 반환 여론 조성에 1918년 11월 석탑은 국내로 돌아오게 되었다. 반환된 탑은 당시 기술로는 재건립이 어려워 1960년까지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보관되었다. 1960년 국립박물관에서 훼손된 부재가 수리되어 경복궁에 세워졌다. 산성비, 풍화작용으로 심각하게 훼손되어 가던 석탑은 1995년 다시 해체되었고 문화재연구소에서 약 10여 년에 걸쳐 보존처리 되었다. 이후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의 용산 재개관 시 ‘역사의 길’ 전시실에서 재조립되어, 100여 년 만에야 비로소 석탑의 그 웅장한 위용을 다시 드러내게 되었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86호로 지정되었다. 경천사 십층석탑은 1978년 ‘석탑 시리즈’ 우표가 발행될 때 제4집으로 소개되었고, 올해 2월 ‘다시 찾은 소중한 문화유산’ 4종 중 하나로 석탑의 탑신부(塔身部)와 상륜부(相輪部)가 우표에 담겼다. -------------------- 참고자료 . 국립중앙박물관(www.museum.g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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