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실패 후 일본을 거쳐 1885년 미국으로 망명, 1889년 워싱턴대학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세균학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본국의 민씨 일파가 몰락하자 1896년 귀국 후 중추원(中樞院)고문에 임명되었다. 즉, 1885년 4월에 다시 미국으로 망명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에는 기독교청년회에서 영어를 공부했다. 1886년 9월에는 펜실베이니아 주 윌크스베어 시에 있는 해리 힐맨 고등학교에 입학해 1889년 6월 졸업했다. 1889년 지금의 조지워싱턴대학교의 전신으로 당시 워싱턴의 고등학교 졸업자 공무원들을 위해 설립한 야간대학인 코크란대학에 입학하여 1893년 졸업하고, 그해 의사면허를 취득했다.
이때는 미국 육군의학박물관에서 동양서적을 번역하는 일로 생계를 유지했으며 1890년 6월 미국인으로 귀화하여 시민권을 얻었다. 1894년 6월 뮤리엘 암스트롱과 결혼한 후 워싱턴에서 병원을 개업했으나 백인들의 유색인에 대한 편견으로 생활이 어려워 조선으로 돌아올 때는 주미조선공사관에서 여비를 마련해주었다.
한편, 정부예산을 얻어 《독립신문》을 발간하는 한편, 이상재(李商在) ·이승만(李承晩) 등과 독립협회(獨立協會)를 결성하고 모화관(慕華館)을 인수 ·개축하여 독립회관으로 하였다. 1897년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으나 수구파(守舊派) 정부와 일부 외국인의 책동으로 다시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펜실베이니아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있다가 3 ·1운동 소식을 전해 듣고 잡지 The Evening Ledger》와 제휴, 한국문제를 세계 여론에 호소하는 한편 한인친우회(Friend of Korean)를 조직, 재미교포들을 결속하여 독립운동후원회를 만들었다.
그 후 상해임시정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외교위원장 자격으로 활약, 1922년 워싱턴군축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연판장을 제출하고, 1925년 호놀룰루의 범태평양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 일본의 침략을 폭로 ·규탄하였다. 1947년 미군정 장관 J.R.하지의 초청으로 귀국, 미군정청고문(美軍政廳顧問)으로 있는 동안 국민의 추앙을 받았으나 이승만과의 불화 및 시국의 혼란함을 개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쳤다. 미국에 있던 그의 유해는 전명운(田明雲)의사의 유해와 함께 1994년 4월 8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차석찬의 역사창고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