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율은 조방장 조경을 시켜 행주산성을 수축하게 하고 목책을 만들게 하였으며, 병사 선거이는 금주, 창의사 김천일은 강화, 충청감사 허욱은 통진에서 각각 그를 지원하기로 하였다. 한편 일본군은 이 무렵 총퇴각을 감행하여 서울 부근으로 집결할 때였으므로 그 병력이 대단하였고, 1월 말의 벽제관에서 승리한 직후여서 그들의 사기 또한 충천해 있었다. 2월 12일 새벽 일본군은 3만여 병력으로 내습하였고 여러 겹으로 성을 포위하 고 종일토록 맹공격해왔다.
행주산성의 지형은 전방만 뚫려있으며 후방에 한강이 흐르고 있었으므로 배수진이 되었다. 왜군은 오직 전방에서만 공격이 가능했다. 이에 권율은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왜군과 맞서 치열한 싸움을 계속하였으며, 당시 행주산성의 싸움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마침내 일본군은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는데, 권율은 이를 추격하여 130여 명의 목을 베었으며 적장의 우두머리들등에게도 큰 부상을 입혔다. 행주산성의 전투는 임진왜란의 3대첩 중의 하나로, 권율은 이 공로로 도원수가 되었다. 당시 부녀자들이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만들어 입고 적군들에게 던질 돌덩이를 운반한 것이 행주치마의 유래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역사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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