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히긴스, 나는 여자가 아니라 기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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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23. 6. 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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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 히긴스(Marguerite Higgins, 1920~1966)는 아일랜드계 미국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홍콩에서 태어났다. 매기(애칭)는 귀엽고 어린애 같은 면이 있었는데 그녀의 미모는 대단히 유혹적이었다. 프랑스에서 중학교까지 교육받고 미국 캘리포니아 UC버클리대학에서 수학한 후 뉴욕 헤럴드 트리뷴에 기자로 입사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과 폴란드 러시아 등 유럽 각지를 누비며 트리뷴의 베를린 지국장으로 근무하던 그녀는 1950년 도쿄 특파원 겸 지국장에 임명되었다. 그녀 나이 서른이었다. 일본에 도착한 지 나흘 만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6월 27일 미군 수송기에 몸을 싣고 김포비행장에 날아왔다. 한국전쟁 최초의 여성 종군기자가 되었다. 28일 새벽 2시 반쯤 한국군 공병대는 한강 인도교를 예고 없이 폭파해 버렸다. 폭파 당시 인도교에서 약간 떨어져 있던 히긴스 일행은 무사했으나 한강을 건널 수는 없었다.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몇 시간 걸어 수원에 도착했다. 수원에서는 국제전화가 불가능해 기사 송고를 위해 미군기를 타고 도쿄에 가 트리뷴 본사로 첫 기사를 보낸 히긴스는 다음 날(29일) 다시 한국으로 날아왔다. 미 8군 사령관 워커(Walton H. Walker, 1889~1950) 중장은 미군이 여성용 화장실과 침실을 따로 만들어 줄 만큼 여유가 없으므로 여성 종군기자는 사양한다고 말했다. 히긴스는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특별대우를 해달라고 요청한 일도 없고 요청할 생각도 없다. 나는 옷을 입은 채 아무 데서나 자며, 개천에서 목욕하고 덤불숲 뒤에서 볼일을 본다. 다행히 한국에는 덤불숲이 많아 좋다”고 응수했다. 그러나 그녀는 워커 장군을 만나러 대구 8군사령부에 갔다가 그를 만나지도 못하고 강제로 미군 수송기에 실려 일본으로 추방되었다. 히긴스는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 유엔군 총사령관에게 강력하게 항의하여 한국전선 종군을 허락받았다. 그녀는 1950년 12월까지 한국전쟁을 취재했고 1951년 봄(War in Korea, 자유를 위한 희생)을 집필했다. 이 책을 들고 미국 전역을 돌면서 ‘한국을 도와야 한다’고 호소했다. 1951년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히긴스는 국제정치 전문기자로 활동하며 프랑코, 흐루시초프, 네루 등을 인터뷰했다. 1963년에는 베트남전쟁 종군기자로 라오스에서 취재하다 풍토병(리슈만편모충증)에 걸려 미국으로 돌아왔지만 이로 인해 사망했다. 유해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2010년 우리 정부는 그녀에게 수교훈장 흥인장을 수여하였다. 한국전쟁 관련 우표는 여러 차례 발행되었다. 전쟁 중인 1951년 자유여신상과 UN표장 그리고 태극기와 21개 참가국 국기를 담은 UN군 참전 기념우표와 소형쉬트를 발행한 것을 비롯하여 전쟁 25돌(1975, 4종)과 60주년(2010)을 상기하는 우표 그리고 밀레니엄시리즈 중 하나로 6.25전쟁(2001)을 우표에 담았다. 미국 우정성도 2000년 히긴스 기념우표를 발행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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