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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여행

인물과 역사를 바로 알고 현재 우리의 모습과 비교해 봄으로써 선조들의 지혜를 알아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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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리나라 역사 & 우표] 당나라를 떨게 한 고구려의 명장 연개소문!
등록일 2015. 5. 20.
첨부파일 첨부파일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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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를 떨게 한 고구려의 명장 연개소문!

대륙의 거센 모래폭풍과 대양의 거대한 파도가 연상되는 진짜 사내 연개소문

연개소문(淵蓋蘇文, ?~665?)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임금을 죽인 역적이며, 고구려의 멸망을초래한 장본인으로 기록한 반면,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위대한 혁명가로, 박은식은 [천개소문전]에서 독립자주의 정신과 대외경쟁의 담략을 지닌 우리 역사상 일인자로 평가했다. 유교사상의 지배를 받던 조선시대까지 왕을 죽이고 나라를 망친 인물로 평가받았으나, 민족의 자주정신이 요구되던 20세기 자주적인 혁명가로 재인식된 것이다.

정권을 장악하다
연개소문은 생김새가 씩씩하고 뛰어났으며 수염이 아름다웠다. 또, 의지와 기개가 커서 작은 것에 얽매이지 않았다고 한다. 남생의 묘지명에는 연개소문의 할아버지 이름은 자유(子遊), 아버지 이름은 대조(大祚)이며 모두 막리지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연개소문의 아버지에 대해 남산의 묘지명은 대로(對盧)라고 하였고, 《신당서》는 동부대인(東部大人) 대대로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아버지가 죽자 개소문이 그 자리를 이어받으려 하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미워하여 어렵게 뒤를 이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나중에 연개소문의 세력이 강해지자 여러 대인(大人)들이 왕과 상의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다. 연개소문은 이를 미리 알고 자기 부(部)의 군사를 모아 열병(閱兵)을 한다는 구실로 잔치를 베풀어 대신들을 초대한 뒤 모두 죽였는데, 이때 죽은 자가 100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궁궐로 가서 영류왕을 죽이고 대신 왕의 동생인 장(臧)을 새 왕으로 세우니, 그가 바로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寶藏王)이다. 쿠데타에 성공한 연개소문은 막리지에 오른 뒤 귀족회의가 가지고 있던 병권(兵權)과 인사권(人事權)을 장악하였다. 이때 그가 대장군에 해당하는 대모달(大模達)에 취임했다는 설도 있다.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쥔 연개소문은 이후 어느 시기에 다시 대대로에 취임하였다. 고구려 후기에 대대로는 3년이 기한이며 연임이 가능한 직책이었다. 또한 왕이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귀족회의에서 합의로 선출하는 직책이었는데, 귀족들 간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무력이 동원되기도 했다.

당나라와의 대결
연개소문은 외교 면에서 대당강경책(對唐强硬策)을 전개하였다. 고구려는 수(隋)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뒤 침략에 대비하였으며, 영양왕 때에는 수나라가 침입하려 하자 오히려 먼저 공격하는 강경책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당나라가 건국한 뒤로는 온건책을 펴오다가 연개소문이 집권하면서 강경책으로 전환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신·구 귀족 사이의 갈등과 연관시키기도 한다. 흔히 구귀족은 대외 온건파, 신귀족은 대외 강경파로 보는데, 이들 중 누가 집권하느냐에 따라 대외 정책이 변한다는 것이다. 연개소문은 신귀족 세력으로 분류된다. 연개소문은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기도 했다. 고구려와 백제의 침입을 받은 신라는 위기를 느끼고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에 보내 화친을 요청했으나 연개소문은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신라는 당나라로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견제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중재에 나선 당나라가 고구려로 사신을 보냈지만, 연개소문은 당나라의 사신마저 가두어 버렸다. 당시 당나라는 중화질서의 확립이라는 명분, 고구려와 기타 세력 사이의 연합을 막아 국가적 위협을 제거해야하는 실리 양쪽 모두를 위해 고구려를 굴복시킬 필요가 있었다. 고구려를 공격할 명분을 찾던 당나라 태종은 고구려가 사신을 가둔 것을 빌미로 침입하였다. 당나라는 초기에 상당한 전과를 올렸지만, 안시성에서 패배함으로써 정벌전쟁을 실패하였다. 당나라는 고구려에게 크게 패배한 이후 함부로 고구려를 공격하지 못했다. 하지만 당나라는 새로운 작전을 내놓았다. 즉 고구려 남쪽의 백제를 멸망시키고, 남과 서쪽에서 동시에 공격하자는 것이었다. 660년 당나라는 신라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내친 김에 고구려를 총공격해 왔다. 소정방, 방효태, 계필하력, 임아상 등이 이끄는 백만 대군으로 총공격을 해온 것이었다. 661년 겨울에 쳐들어온 방효태는 그의 13명의 아들과 함께 수십만의 대군으로 장안성 부근까지 쳐들어왔다. 연개소문은 꽁꽁 언 사수에서 적들을 만나 여기서 적들을 모두 몰살시켰다. 연개소문이 어떻게 이겼는지는 전해지지 않지만, 사수전투의 승리는 전쟁상황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당은 방효태의 대군이 몰살당하자 전군의 퇴각을 명령했다. 압록강 주변의 계필하력 군대가 퇴각한 데 이어 평양 주변을 포위했던 소정방의 군대도 급히 도망쳤다.



그는 고구려를 멸망으로 몰고 간 제일의 원흉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고구려인의 자긍심을 드높이고 저 한족의 콧대를 보기 좋게 꺾어 버린 위대한 민족기상의 상징이란 평가도 있다. 이렇게 상반된 평가는 그의 삶이 너무나 극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풍운아 연개소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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