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5년(보장왕 4) 당나라 태종은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당나라 군대의 주력부대의 침공으로 요동지역에 있던 개모성(蓋牟城 : 撫順 부근)과 비사성(卑沙城 : 大連灣 北岸)이 함락되었다. 이어 당나라 태종의 지휘로 요동성(遼東城 : 遼陽)과 백암성(白巖城 : 遼陽 동남)도 당나라 군대에 함락되었다. 당나라 군대는 다음 공격목표를 놓고 수뇌부 사이에 이견이 있었으나, 이세적(李世勣)의 건의로 안시성 공격을 시도하였다. 이 때 고구려는 당나라 군대에 포위된 안시성을 지키기 위해 15만 병력을 출동시켰으나 안시성에서 8리 떨어진 곳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고립무원의 상황에 처한 안시성에서 그를 비롯한 병사와 주민들은 하나로 뭉쳐 완강히 저항하였다.
발해는 대조영이라는 인물이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모아 길림성 동모산 부근에 세운 나라이다. 당시 고구려 멸망이후 많은 고구려 유민들은 당나라에 끌려가 온갖 핍박을 받게되고 고구려의 옛장군인 걸걸중상과 그의 아들 조영이 주축이 되어 당나라의 토벌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하여 세운 나라가 발해이다. 대조영이 나라의 기반을 다지고 그의 아들인 무왕이 탄탄한 기반과 함께 주변 세력을 정복하여, 후에는 당나라까지 공격을 하였다. 발해의 전성기였던 9세기 선왕때는 최대 영토와 국력을 자랑하며, 중국으로부터 해동성국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당시 발해의 영토는 고구려 광개토대왕 때보다도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다. 여기서 해동성국은 바다 동쪽의 전성기를 맞이한 나라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발해는 고구려 출신 대조영(고왕 高王)이 국가를 세웠으나, 만주지방에 혼거하던 말갈족도 함께 포용하여, 일반적으로 고구려 유족이 주로 상류 지배층을 형성하였고, 말갈족이 하류층을 형성하였다. 대조영은 북서쪽의 거란이나 돌궐족의 성장으로 요서지방이 막혀 당나라의 방해를 받지 않고 발해를 안전하게 운영할 수 있었다. 당도 결국 발해의 자립을 인정하고 외교의 대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왕조로서, 중국이나 신라 등과 활발한 정치, 경제적 교류를 하였더라면 보다 강력한 왕조로서 그 역사적 역할이 막강했을 것이다. 그러나 문화면으로는 고구려의 문화 바탕위에 불교적 색채가 강한 문화를 발전시켰고, 당과의 교류를 유지하여 당문화를 받아들여 문화국가로서의 입지를 유지하였다. 특히, 오랫동안 수도로 사용된 상경용천부의 도성터는 동서 길이가 약 4.6㎞, 남북 약 3.3㎞의 크기로 짜임새있는 도성임이 밝혀졌다.
[두산백과(발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