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감찬 장군 귀주대첩의 신화를 쓰다
거란의 10만 대군을 흥화진(興化鎭)에서 무찔렀으며 달아나는 적을 귀주에서 크게 격파하다
1009년 강조란 인물이 반란을 일으켜 7대 목종을 살해하고 8대 현종을 추대했는데 요가 이 사건을 빌미로 1010년 다시 고려를 침략하게 된다.거란과의 2차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요나라 성종은 고려가 송과의 관계를 끊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화가 나 있는 상태였는데 강조란 인물이 반란을 일으키자 침략을 하게 된 것이다.
요는 고려가 강동 6주를 건설하자 자기들 땅이니 돌려달라고 요구하였다. 물론 고려는 거절했고 이 때문에 고려를 침략하게 된 것이다. 강조가 맞서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는 전사하였고 곧 거란군은 개경 입구까지 쳐들어 왔는데 모두들 우왕좌왕하며 항복해야 한다고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강감찬 장군은 결사항전을 주장하게 되는데
현종은 나주로 피신을 하였고 거란군은 개경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1011년 1월 2차 전쟁이 끝나게 된다. 고려 왕이 요의 성종을 알현하는 입조에 합의를 한 것이다.
고려는 이 무렵 대장경을 만들기 시작을 하였다. 불교의 힘을 빌려 거란군을 물리치겠다는 염원을 담아 초조대장경을 제작하였는데 안타깝게도 훗날 몽골 침략 때 불에 타버리고 말았다.
전쟁이 끝난 후 개경으로 돌아온 현종은 폐허가 된 수도를 보고 크게 분노하였다. 현종은 병을 핑계로 요의 현종을 알현하는 입조 약속을 지키지 않게 된다. 1018년 12월
고려가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며 요의 10만 대군이 고려를 침략하게 된다. 이것이 3차 전쟁의 시작이다. 사실 고려는 이 침략을 예견하고 있어서 20만 대군을 훈련시켜 놓고 있었다.
사령관(상원수)이 바로 강감찬 장군이었다. 그는 압록강 근처 흥화진에 병사를 보내 쇠가죽으로 물줄기를 막도록 하고 얼마 후 거란군이 그곳을 지나갈 때 쇠가죽을 끊게 하였다. 폭포처럼 들이닥친
물줄기에 거란군은 전멸했고 고려는 대승을 거두게 된다. 기세가 크게 꺾였지만 거란군 사령관 소배압은 남은 병력만으로 개경을 정복하겠다며 진격을 강행하였다.
1019년 1월 그들이 개경 입구까지 진격을 하지만 고려군의 기습 공격에 크게 패하게 된다. 결국은 소배압은 철수를 하였고 거란군은 귀주 벌판에 도착할 즈음 강감찬 장군의 20만 대군과 혈투를 벌이게 되고
고려의 대승으로 끝났다. 거란의 남은 병사는 수천 명에 불과하였고 소배압은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본국으로 돌아간 뒤 파면이 되었습니다.
이 전쟁이 바로 강감찬 장군이 승리를 이끈 귀주대첩이다.
[네이버 블로그(귀주대첩 강감찬 장군 최고의 명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