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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역사를 바로 알고 현재 우리의 모습과 비교해 봄으로써 선조들의 지혜를 알아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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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리나라 역사 & 우표] 고려의 왕권을 강화시킨 군주,광종
등록일 2015.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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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왕권을 강화시킨 군주,광종

고려의 4대 황제 광종((925~975, 재위 949~975) ), 아버지는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이고 어머니는 왕건의 제 3비 신명순성왕태후 유씨이다.
- 왕이 되기까지..

왕건은 호족들을 모으기 위한 방법중의 하나로 혼인정책으로 많은 호족들의 딸과 결혼을 하게 된다. 이로 인해 왕건의 부인은 29명이 되고 자식들도 많아진다. 왕건 사후 왕은 태자인 혜종이 되나, 많은 호족들의 견제를 받게 된다. 왕건이 혼인정책으로 왕실의 안정을 꾀하려 하였지만 골육산장의 비극을 부르는 역효과를 보게 된 것이다. 혜종이 왕위에 있었을 때, 왕규는 자신의 딸이자 태조의 부인인 소광주원부인의 아들 광주원군을 왕위에 앉히려는 야심을 품게 된다. 그러나 혜종은 이를 알면서도 왕규를 처벌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왕규에 의해 죽을 고비를 넘기고는 극심한 신경쇠약 증세로 재위 2년 만인 945년 죽게 된다. 그는 후계자를 지목하지 않았고 당시는 신명순성왕후의 둘째아들 요(정종)가 왕위계승후보 1순위였다. 고려 3대 왕 정종은 혜종사망 당일 조정대신들의 추대를 받는 형식으로 왕위에 오른다. 평소 유씨가문과 대립관계였던 왕규는 반란을 일으키지만 정종을 지지하는 서경(평양)세력 왕식렴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된다. 왕식렴은 왕건의 숙부 왕평달의 아들로 건국이후 서경을 관리하고 책임지는 역할을 맡았다. 서경세력의 지지를 받은 정종은 개경파를 비롯한 반대세력의 저항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서경천도를 계획한다. 그리고 서경에는 궁궐을 짓기 위해 많은 백성들이 동원되자 민심은 혼란스러워진다. 948년, 동여진에서 온 소무개라는 사람이 말 700필과 토산물을 바친다. 이를 보고 좋아하던 정종은 갑자기 천둥번개가 몰아치자 병석에 눕고 만다. 왕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접한 백성들은 이제 곧 그가 죽게 될 것이라고 만세를 불렀다 한다. 자신이 환영받지 못한다는 자책감으로 괴로워하던 중 이듬해 왕식렴의 죽음소식을 듣고 더욱 더 충격을 먹다가 두달 후 자신도 27세의 나이로 재위 4년만에 죽게 된다. 그는 정종의 뜻을 받아 왕위에 오르게 된다. 광종은 고려 초 왕권강화를 위해 가장 끈기있고, 정략적으로 노력하여 큰 성과를 거둔 왕으로 주목되고 있다. 나는 광종의 즉위후 재위기간을 세 시기로 나누어 설명하고자 한다.

밀레니엄시리즈(네번째묶음)
- 제 1시기(광종 즉위년~956 광종 7)

선왕 정종의 서경천도계획을 포기하고 개경 내에서 정치적 안정을 위해 힘썼다. 개국 이후 호족을 우대하는 정책을 폈으며, 광덕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여 자주적인 외교와 위엄을 보였다. 또한 경제제도의 정비를 단행하고, 중국의 왕조와 활발한 외교 교섭을 벌여 왕조로써의 정치적 기반을 닦았다. 또한 항상 <정관정요>를 읽어 이상적 유교정치를 수행하려는 의지를 보였으며, 불교에도 관심을 보이는 등 온건한 정치를 하였다. 성종시기 유학자 최승로는 이 시기를 '하.은.주(중국의 초기왕조) 삼대에 견줄 만 하다' 고 격찬했다.


- 제 2시기(956 광종 7~960 광종 11)

전제왕권을 강화하고 호족과 공신세력의 특권을 억제하는 조치를 취한다. 956년 노비안검법을 실시한다. 건국이후 많은 호족과 공신들이 많은 노비를 소유하여 그들이 군사적, 경제적 배경을 형성하고 있었다.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안검하여 양민으로 만들어 호족과 공신의 세력기반에 큰 타격을 주어 당시 호족과 공신세력들의 커다란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958년(광종 9)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의 건의로 과거제도를 시행한다. 이때 처음 실시한 과거제는 이후 광종대에만 8번의 과거를 실시하여 39명의 급제자를 배출했다. 과거제도의 의미는 무반공신들을 정치적으로 약화시키고 왕에 대한 충성을 본문으로 하는 유교사상을 가진 신진인사를 기용함으로써 왕권강화를 위한 개혁을 수행해나가는데 상당한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960년(광종 11) 백관의 공복(관복)제도를 시행하여 새롭게 나온 정치세력들을 공적으로 인정하고 관료체제를 새로 개편한다. 당시 제정된 백관의 관복은 자, 단, 비, 녹의 4색으로 하였다.


- 제 3시기(960 광종 11~975 광종 26)

왕권강화에 반대하거나 장애가 되는 세력들을 제거하는 공포정치의 시기이다. 그 첫 시작은 960년 권신이란 사람이 준흥, 좌승, 왕동 등이 역모를 꾀한다고 고변한 사건이다. 광종은 이들을 귀양보내고 혜종과 정종의 아들을 죽이는 등 대숙청을 단행한다. 광종 말년에 살아남은 옛 신하들은 40명, 왕건 사후 50년 왕씨는 단 한 명 밖에 존재하지 않았던 광종의 숙청작업은 고려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준흥 등의 역모사건 이후부터 참소(신고)하고 아부하는 무리가 뜻을 얻어 충직한 사람을 모함하고, 종이 그 상전(주인)을 고소하며, 자식이 부모를 참소(신고)하여 감옥이 항상 가득 차서 따로 가옥(임시감옥)을 설치하게 되었으며, 죄 없이 살육 당하는 자가 줄을 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고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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