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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여행

인물과 역사를 바로 알고 현재 우리의 모습과 비교해 봄으로써 선조들의 지혜를 알아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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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리나라 역사 & 우표] 왕건 신라말 분열된 한반도를 통일하다.
등록일 2015. 9. 2.
첨부파일 첨부파일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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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 신라말에 분열된 한반도를 통일하다.

918년 왕건은 신라말에 분영된 한반도를 다시 통일하다
처음 왕건(王建)이 신라 말에 나라를 세워 분립된 후삼국을 통일하고, 성종 때 중앙집권적인 국가기반을 확립시킨 후 문종 때 이르러 귀족정치의 최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1170년(의종 24) 무신란(武臣亂)이 일어나 1백년간의 무신정권이 성립되었다. 그 뒤 다시 1백여 년 동안의 원나라의 간섭기를 거쳐, 14세기 말 이성계(李成桂)가 고려를 넘어뜨리고 조선을 건국하였다. 9세기 말 신라의 국력이 쇠약해지자, 각지에서 군웅이 할거하였다. 그 가운데 전라도지방의 견훤(甄萱)과 중부지방의 궁예(弓裔)가 세력이 가장 왕성해 후삼국의 정립을 보게 되었다. 왕건은 송악(松嶽: 지금의 개성)지방의 호족으로서 궁예의 부하로 활동하다가, 918년 민심을 잃은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웠다. 왕건은 935년신라의 귀부(歸附)를 받고, 이듬해 후백제를 멸망시켜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태조는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자처해 국호를 '고려'라 하고 북진정책을 추진해 서경(西京 : 지금의 평양)을 중시, 북방을 개척해 국경선을 청천강까지 확대하였다. 또한, 거란의 침략으로 발해가 멸망하자, 고구려계통의 발해유민을 받아들여 포섭하였다. 태조는 대내적으로 반독립적인 상태에 있는 호족세력을 통합하기 위해 호족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혼인정책을 쓰고, 기인제도(其人制度)와 사심관제도(事審官制度)를 실시하였다. 호족세력을 억압해 왕권을 안정시키려는 태조의 집권화정책은 그 뒤 광종의 훈신숙청과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 및 과거제의 실시로 나타났다. 경종 때는 전시과의 제정으로 집권체제의 경제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성종 때는 내외의 정치제도가 정비되어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가 성립되었다. 성종은 당나라 제도를 채용해 삼성육부의 중앙관제를 제정하고, 처음으로 지방관을 파견하는 한편, 지방호족들의 지위를 격하하는 향직을 개혁해 중앙집권체제의 확립을 보게 하였다. 귀족사회 형성의 기반이 마련된 성종 이후 현종을 거쳐 문종에 이르는 사이에 고려의 정치기구와 토지제도 및 신분체제가 완비되어 절정기를 맞았다. 문종 때는 고려의 귀족정치가 절정기에 이르러 귀족문화가 난숙해지고, 경제적·정치적으로 국력의 신장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이 때부터 귀족사회 내부의 모순이 축적되어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인종 때의 '이자겸(李資謙)의 난'과 '묘청(妙淸)의 난'은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의종 때는 무신란이 일어나 귀족사회를 붕괴시키고 말았다.
밀레니엄시리즈(네번째묶음)
1170년 정중부(鄭仲夫) 등 무인이 일으킨 무신란으로 문신의 귀족정치는 끝나고 새로이 무인들의 정권이 성립되었다. 이 때 무인집정을 정점으로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해 문신을 억압하고 왕권이 약화되었으며, 사회질서의 문란으로 각지에서는 민란이 발생하였다. 무신정권은 교정도감(敎定都監)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지배기구를 설치하고, 막대한 사병을 양성해 무력기반으로 삼았으며, 광대한 토지를 집적해 경제적 기반을 이루었다. 그러나 1270년 몽고의 세력을 업은 원종과 그 일파의 거사로 무신정권이 몰락하고 왕정이 복구되었다. 그러나 고려는 원나라의 압박 아래 놓이게 되었다. 고려 무인의 마지막 대몽항전인 삼별초의 저항(1270∼1273)이 끝나자, 원나라의 요구에 따라 두 차례나 일본정벌에 동원되었다. 또한 왕실은 원나라에 예속되어 원나라의 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이고 왕실의 호칭도 낮추어 부르게 되었다. 관제도 격하되고 직접 원나라의 관청인 정동행성(征東行省)이 설치되고, 또 함경도와 평안도지방에 쌍성총관부와 동녕부가 설치되어 영토의 일부를 빼앗기게 되었다. 고려 후기의 지배세력은 권문세족으로 일컬어지는 보수세력이었다. 친원파를 중심으로 형성된 권문세족은 도평의사사에 앉아 정권을 장악하고 광대한 농장을 소유해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가문을 중요시한 점에서 종래의 문벌귀족의 일면을 계승하면서도 또한 현실적인 관직을 중시하는 새로운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이 때 점차 학자적 관료인 사대부가 공민왕의 개혁정치로 인해 신흥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기성세력인 권문세가과 대항하면서 정치의 표면에 나서게 되었다. 그 뒤 고려는 이들 신흥사대부세력과 결탁한 이성계에 의해 멸망되고 새 왕조로 교체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고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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