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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여행

인물과 역사를 바로 알고 현재 우리의 모습과 비교해 봄으로써 선조들의 지혜를 알아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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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리나라 역사 & 우표] 목화재배와 면포생산 보급의 선구자 문익점
등록일 2015. 11. 18.
첨부파일 첨부파일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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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화재배와 면포생산 보급의 선구자 문익점

초기 재배의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고 여러 해 동안 노력한 끝에 재배에 성공하고 면직물 생산 기술까지 전파하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들여오기 전까지 이 땅에는 면직물이 전혀 없었을까? 당나라 때 편찬된 역사서 [한원(翰苑)]에는 고구려가 백첩포(白疊布)라는 면직물을 생산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삼국사기] 신라 경문왕 조에는 869년 7월에 다른 여러 물품과 함께 백첩포 40필을 당나라에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2010년 7월에는 국립부여박물관이 1999년 부여 능산리 절터 출토 백제시대 직물 1점을 분석한 결과, 우리 땅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면직물임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역사기록과 유물로 볼 때 문익점이 목화씨를 들여오기 전에도 한반도에서 면직물이 생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문익점이 들여온 목화가 인도종이며 그전 한반도에서 만들어진 면직물의 원료는 아프리카종, 즉 초면(草綿)이었다는 설이 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목화와는 다른 원료였다는 것. 또한 삼국 시대 목화는 중앙아시아 품종이어서 우리 토양과 기후와 잘 맞지 않아 대량 재배되기는 힘들었고, 면직물도 대외 교류 등에서 소량이 사용되는 매우 귀한 직물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결국 우리 기후와 토양에 맞게 적응되어 본격적으로 목화 대량 재배와 면직물 생산이 이뤄진 것은 문익점 이후의 일이라는 뜻이 된다. 문익점이 들여 온 목화씨가 방적하기 편한 종류의 것으로 대량 생산에 적합했으리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삼국 시대 면직물 생산이 분명하다 하더라도, 한반도 목화 재배의 역사와 면직물의 역사에서 문익점이 차지하는 중요성에는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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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입에서 정착과 보급으로 나아간 큰 공로
문익점 이전에도 누군가 목화씨를 들여와 심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더러는 목화 재배에 성공한 사례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도입은 했을지언정 그것을 이 땅에 정착시키고 재배법과 면직물 생산기술을 널리 보급시키지는 못했던 것이다. 문익점과 정천익은 살아남은 한 그루를 다시 3년 간 가꾸어 대량 재배의 가능성을 열었다. 또한 원나라 승려 홍원의 도움을 받아가며 솜에서 씨앗을 빼는 씨아와 실을 잣는 물레를 만들어 보급했다. 문익점의 큰 공로는 목화씨를 들여온 사실 자체보다 바로 이러한 정착과 보급에 있었다. 백성들의 신산한 삶을 나타내는 '헐벗고 굶주린다'는 표현이 있다. 이 땅에서 목면이 일반화되기 전까지 사람들 대부분은 베옷으로 사시사철을 지내야 했다. 여름에야 통풍이 잘 되어 시원하다고 하지만, 한 겨울에도 베옷을 입고 지내야 하는 고통은 '헐벗은 고통' 바로 그것이었다. 베옷 안쪽에 풀잎이나 짐승의 털을 넣기도 했지만, 삼베옷을 가지고서는 보온 효과를 보기 힘들었다. 문익점이 널리 존경 받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이렇게 '헐벗었던' 백성들의 의생활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는 데에 있다. 더구나 문익점에서 시작된 목면 생산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국가 경제에 큰 기여를 했다. 일일이 손으로 실을 만들어야 하고 마를 가공하는 과정에서 남성 노동력이 많이 드는 베와 비교하면, 씨아와 물레를 사용하는 목면은 생산성이 매우 높고 여성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었다. 목화 재배와 목면 생산을 특히 적극 장려했던 세종이 문익점을 '부민후(富民侯)', 즉 백성을 풍요롭게 만든 이로 추증토록 한 것은 농가 경제를 두텁게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 결과이다. 문익점은 민생 향상과 국부 증진에 큰 도움이 되는 하나의 새로운 산업을 탄생시킨 인물로 존경 받았다.

[네이버캐스트(문익점)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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