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이들은 입이 궁금하거나 간식이 먹고 싶을 때면 과자를 찾지만 옛날에는 고구마나 감자, 옥수수 등이 전부였다.
집안에 제사나 잔치가 있어 약과나 옥춘(玉瑃), 유과 등의 한과를 만들 때면 온 집안에 고소한 냄새가 진동하였다. 특히 약과를 튀길 때면 집안 가득 진동하는
참기름 냄새에 지나가던 나그네가 발길을 멈출 정도였다. 아마도 ’애간장이 녹는다’ 는 표현은 이런 상황에 딱 맞는 말이 아닌가 싶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약식동원의
조리법이 발달하여, 몸에 좋은 약재를 이용한 음식이 발달했다. 본래 ‘약(藥)’이란 병이나 상처를 고치기 위해 복용하거나 바르는 물품을 일컫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귀한 것에 ‘약(藥)’자를 붙였다.
예로부터 꿀은 귀한 식품으로 값이 비싸고, 민간에서는 약으로도 사용하였다. 따라서 음식에 꿀을 사용할 경우 ‘약’자를 붙여 꿀술을 ‘약주(藥酒)’, 꿀밥을 ‘약밥(藥食)’이라
하였으며, 꿀 넣은 과자를 약과(藥果)라 하였다. 즉, 약과는 귀하고 약이 되는 꿀을 사용하여 만든 과자로 몸에 이로우며 동시에 병을 고쳐 주는 음식이라 하겠다.
우리나라의 연중행사와 풍습을 기록한『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1819)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1849)에 '우리나라 풍속에는 꿀을 약용하므로, 밀반(密飯)을
약밥이라 하고, 밀과(密果)를 약과라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 후기 발간된『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와 『지봉유설(芝峰類說)』(1614)에는
‘그 재료인 밀은 춘하추동을 거쳐서 익기 때문에 사시(四時)의 기운을 받아 널리 정(精)이 되고, 꿀은 백약(百藥)의 으뜸이며, 기름은 살충(殺蟲)하고 해독(解毒)하기
때문이다'고 기록되어 약과 재료의 특징을 잘 설명하고 있다. 또한 『규합총서(閨閤叢書)』(1809)에도 ’유밀과를 약과라 하는 것은 밀(蜜)은 사계절의 정기요, 꿀은
온갖 약의 으뜸이요, 기름은 벌레를 죽이고 해독하기 때문에 이르는 말이다’ 라고 하여 약과에는 약식동원(藥食同原)의 정신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약과는
고려시대에 널리 유행하여 왕족과 귀족, 그리고 사원과 민가에서 널리 즐겨 먹었는데, 후일 ‘왕족과 반가, 사원에서 유밀과를 만드느라 곡물과 꿀, 기름 등을 많이
허실함으로써 물가가 올라 민생을 어렵게 한다’고 하여, 고려 명종 22년(1192)과 공민왕 2년(1353)에는 유밀과의 제조금지령을 내렸다.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러
약과가 대표적인 기호식품이 되었다. 최남선의『조선상식문답(朝鮮相識問答)』(1948)에는 ’조선에서 만드는 과자 가운데 가장 상품이며, 또 온 정성을 들여
만드는 점에서 세계에 그 짝이 없을 만큼 특색 있는 과자다”라고 하면서,’ 속칭 과줄이라 하고 한자로 조과(造果), 혹은 약과(藥果)라고 쓴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약과는 재료가 귀할 뿐만 아니라 만드는 데도 많은 정성이 드는 음식임을 알 수 있다. 약과는 밀가루에 참기름과 꿀 등을 넣고 반죽한 것을 기름에 튀긴
유밀과의 하나로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사치스럽고 고급스러운 과자 중 하나로 통과의례나 명절, 잔치, 제향(祭享)시 필수음식이었다. 일반적으로 약과는 꽃모양이나
새, 나비 등 다양한 모양의 약과 판에 박아서 만들며, 개성의 약과는 반죽을 접어 펴서 네모지게 잘라 만드는 것이 다르다. 이익의『성호사설(星湖僿設)』(1763)에는
’약과는 여러 가지 과실 모양이나 새의 모양으로 만들었던 것이나, 후일에 고이는 풍습이 생겨나면서 넓적하게 자르게 되었다’ 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약과가
처음에는 대추, 밤, 배, 감, 물고기, 짐승 등의 모양이었다가 점차 변하여 조선시대에는 원형이 되었고, 제사때 사용하는 약과는 제사상에 쌓아 올리기 불편하여
다시 방형(方形)이 된 것으로 추측한다.
[한국콘텐츠진흥원 (재미있는 세시음식이야기)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