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고려시대의 시가 가운데서 경기체가,향가,시조,가사 등의 유에 속하는 작품들을 제외한 나머지 우리말 시가 작품들을 가리킨다. 학자에 따라 이를 ‘고속가(古俗歌), 장가(長歌), 속악가사’ 등으로 부르기도 하며, ‘별곡(別曲)’이라는 이름으로 경기체가와 속요를 함께 묶어 양자의 공통성을 강조한 경우도 있다. 작품으로 <도이장가>, <정읍(사)>, <사모곡[엇노리]>, <정과정(곡)>, <이상곡>, <유구곡[비두로기]>,
<상저가>, <가시리[歸乎曲]>, <동동>, <청산별곡>, <정석가>, <서경별곡>, <쌍화점>, <만전춘(별사)>, <처용가> 등의 15편 가량이 전해지는데,
이 가운데서 <청산별곡> 등의 몇 편은 문학적 가치가 매우 높은 명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대체로 ‘시’로서보다는 ‘노랫말[歌詞]’로서의 성격과 모습을 지니고 기록되어 전승되었기 때문에 얼마 안 되는 작품수에 비해 매우 다양한 형태들을 보여 준다.
또한 현전하는 고려속요 가운데서 작자와 창작시기를 뚜렷이 살필 수 있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이처럼 대다수 작품들의 작자가 알려지지 않는 까닭을 고려속요의 생성 방식 및 과정과 관련시키기도 한다. 속요의 밑바탕을 이루는 민요는
하층민의 집단적인 공동작으로 작자를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하며, 그러한 민요를 고려 후기에 왕실의 주변인물인 권문세족(權門世族)이
새로운 궁중무악(宮中舞樂) 또는 연악(宴樂)으로 재편하여 궁중악으로 수용하는 과정에서 속요가 생성되었으므로, 속요를 처음부터 어느
개인이 뚜렷한 창작의식을 가지고 창출한 개인창작가요로 볼 수가 없고, 따라서 어느 특정인을 작가라 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한때 속요의 대부분이 민요 특유의 반복·병치의 구조와, 민중의 일상어, 보편적 율격인 3음보격을 두루 갖추고 있다는 점 때문에,
속요를 민요와 동일시하고, 그 작자층을 고려시대의 민중층으로 이해한 적이 있었다.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고려속요)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