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우리에게 보통명사(‘수도(首都)’ 또는 ‘도읍(都邑)’)이자 고유명사(‘서울’)로 통하는, 말 그대로 ‘특별한 도시’다. 서울이 이처럼 이중적 의미를 갖게 되기 전,
평양이나 부여나 경주나 개성이 ‘서울’이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보더라도, 한강과 북한산으로 둘러싸인 이 지역의 중요성은 많은 사람이 익히 알고 있었다.
‘한강을 지배하는 자가 한반도의 패권을 장악했다’는 사실은 삼국항쟁시대사의 상식이거니와, 마침내 삼각산 일대를 정복한 신라인들의 감격을 돌에 새긴 진흥왕순수비는
이 지역의 지정학적 중요성에 대한 당대인들의 인식을 웅변한다.
서울은 개경 일대에 근거지를 둔 고려의 지배층들이 ‘남경(南京)’이라 부른 곳으로, 이미 고려 문종이 궁궐을
짓고(1067) 숙종(1095~1105)이 서울로의 천도 계획까지 세웠던 곳이니, 새 왕조를 개창한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한 일이 전혀 새로운 발상은 아닌 셈이다.
고려 말의 ‘역성혁명’이 ‘한양 정도(漢陽定都)’로 이어지는데 풍수도참설이 큰 영향을 미쳤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여진족과 왜구 토벌을 위해 한반도 전역을 누비고 다닌
태조의 ‘국토관’과 공간 감각도 적지 않게 작용했을 것이다. 국토의 중앙부에 위치하면서 남한강과 북한강의 수운을 활용할 수 있는 한양은 한반도 전역을 통치할 도읍지로 최적의
선택지였다. 19세기까지 500여 년간 한반도에서 ‘사실상 유일한 도시’이자, 지난 600여 년간 한반도를 압도적으로 지배해 온 수도 서울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한양 땅을 하늘에서 내려다 보면 풍수지리적 요소가 무척 잘 어우러져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한양을 병풍처럼 둘러싼 북악산, 남산, 낙산, 인왕산은 북쪽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겨울바람을 막아 주고, 외적의 방어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준다. 그리고 산으로 둘러싸인 공간에는 드넓은 시가지가 펼쳐져 있고,
그 안쪽으로는 청계천이, 바깥쪽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있어 식수를 구하기도 쉬웠다. 한양은 외사산(外四山)으로 먼 경계를 두르고, 내사산(內四山)의
능선을 따라 쌓은 타원형 성곽으로 성 안팎의 공간을 구분했으며, 도성에는 모두 8개의 문을 내었다. 동서남북 사방에 각각 흥인지문(興仁之門), 돈의문(敦義門), 숭례문(崇禮門),
숙청문(肅淸門)의 사대문을 두었고, 그 사이에 광희문(光熙門), 소의문(昭義門), 창의문(彰義門), 혜화문(惠化門)의 사소문을 두어 도성 내부와 외부를 연결하는 통로로 삼았다.
사대문에다 중앙의 보신각(普信閣)까지 인·의·예·지·신의 유교적 덕목을 각 방위의 결절점에 새긴 도성 공간은 유교적 이상주의의 산물로서, 군자들이 사는 유토피아의 꿈을
구현한 이상향적 공간이었다.
[도시는 역사다, 2011. 6. 1., 서해문집 (수도의 탄생])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