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공양왕으로부터 왕위를 선양 받은 이성계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최고 의사결정기관인 도평의사사에 한양으로의 천도를 명하였다.
실제로 한양천도가 최종 확정되고 현실화되기까지는 2년여의 기간이 더 걸렸지만 조선건국초기부터 한양은 새로운 도읍지로 주목을 받았던 것이다.
태조 이성계가 이렇게 천도를 서두른 이유는 고려의 지배층이 엄존하고 있는 개성을 떠남으로써 구지배세력의 영향력을 배제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이것이 조선왕조가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을 속히 떠나려고 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어째서 한양으로서의 천도를 추진했는가에 대해서는 또 다른 설명이 필요하다.
한양천도에는 신라 말이래 정치적, 사회적 혼란기마다 대두되었던 풍수지리설의 영향이 컸다. 개성의 지덕(地德)이 이미 다했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논리인데, 한양은 언제나 주요 후보지로 거론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천도를 정당화시키고 대내적 동의를 얻어내기 위한 방편이라는 성격이 켰다.
한양을 도읍지로 선택하게 된 가장 실질적인 요인은 한양이 갖추고 있는 인문 지리적 조건이었다.
하나의 왕조가 도읍지를 선택하는 데는 무엇보다 인문 지리적 요인이 중시 되지 않을 수 없다. 한양은 산으로 둘러쌓여 있는데다가 서쪽이 바다요, 남쪽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있어 무엇보다 군사적인 방어에 유리한 지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군사적인 이점에 더하여 또 하나의 중요한 요건이 교통의 편리함이었다.
당시는 경제생활의 대부분을 농업에 의존하고 있었다. 따라서 세금으로 거두어들이는 농업생산물이 국가재정의 기반이었다. 정부는 조세곡(租稅穀)을 거두어 수도로
운반해 오는데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육상교통은 극히 빈약했기 때문에 육로를 통해 곡물을 운반하는 것은 매우 곤란했고, 조세곡의 대량수송은
수상교통에 의존해야만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국가의 도읍지는 국토의 중심부에 위치하면서도 조세운반이 편리한 곳에 자리잡아야 했다. 이 점에서 한강 유역에 위치한
한양은 다른 어떤 곳과도 비교될 수 없는 이점을 갖추고 있었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지로 점찍은 것도 바로 교통 조건을 중시했기 때문이었다. 그 자신이 한양의 형세에 대해 말하기를 “조운(漕運)하는 배가 통하고 사방이 이수(里數)도
고르니 백성들에게도 편리할 것”이라고 하였다. 조선후기의 지리서인 『택리지』에서도 “한강변의 강촌들은 모두가 서해의 이점을 이용하여 팔도의 배가 모이는 곳”이라 하여
수운의 편리함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한강은 서해의 바닷길을 서울까지 이어주는 내륙수로였던 것이다.
한양은 외적방어를 위해서도 유리한 지형을 갖추고 있었다. 한양은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중앙이 평탄한 분지지형인데다가, 남쪽으로 한강이 감싸고 흘러 외적을 방어하기에 좋았다.
한강은 수로로서는 교통로의 역할을 하지만, 육로의 측면에서 보면 육로를 끊는 일종의 장애물이었다. 이 점은 방어의 측면에서는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었다.
이러한 지리적인 유리함에 바탕 하여 한양은 조선왕조의 도읍지로 선택되었다. 1394년 10월, 드디어 조선왕조는 새 도읍지인 한양으로의 천도를 단행하였다. 이렇게 해서 서울은 한반도의
정치적, 경제적 중심으로서 본격적으로 역사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이후 한양은 조선왕조 5백여 년 동안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의 중심무대가 되었으며, 조선왕조가 멸망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그 역할을 지속하고 있다. 또한 중앙집권적 통일국가의 수도가 한강 유역에 위치하게 됨으로써 한강은 명실상부하게 한반도의 역사적 삶을 응축하는 상징으로 자리 매김하게 되었다.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한강 생활문화)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