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는 이러한 가문의 배경과 타고난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크게 활약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361년 10월에 반란을 일으킨 독로강만호 박의(朴儀)를 잡아 죽였다.
같은 해 홍건적이 침입해 수도가 함락되자 이듬 해 정월 친병 2,000명을 거느리고 수도탈환작전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다.
1362년 원나라 장수 나하추가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홍원지방으로 쳐들어와 기세를 올리자 그는 동북면병마사에 임명되어 적을 치게 되었다. 여러 차례의 격전 끝에 마침내 함흥평야에서 적을 격퇴시켜 명성을 크게 떨쳤다.
1364년 최유가 원나라 황제에 의해 고려왕에 봉해진 덕흥군(德興君)을 받들고, 원병(元兵) 1만 명을 이끌고 평안도지방에 쳐들어왔다. 이에 최영과 함께 수주 달천에서 이들을 섬멸했다.
이 무렵 여진족이 삼선(三善)·삼개(三介)의 지휘 아래 동북면에 침범하여, 함주까지 함락하는 등 한때 기세를 올렸다. 이성계는 이들을 크게 무찔러 동북면의 평온을 되찾았다.
자신의 능력으로 승승장구하며, 입지를 확고히 한다 하여도 이성계에게는 변방지역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었기에, 누대에 걸쳐 뿌리내린 막강 권문세족들이 버티는 고려 중앙
정치 무대에서 그의 성장은 한계가 있었다. 특히 같은 시기 이성계와 함께 외적을 퇴치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권문세족 출신의 최영에게는 이성계로서는 넘어서기 어려운 존재감이 있었다.
공민왕 사후 한때 중앙 정계를 주름잡던 이인임 세력을 최영과 함께 물리친 이성계는 수문하시중의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언제나 최영의 다음 자리였다.
이즈음 국제 정세는 원나라가 북쪽 몽골 지역으로 쫓겨 가고 명나라가 중국 본토를 차지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었다. 중국 본토를 차지한 후, 명나라는 원?명 교체기의 혼란한 상황 동안
돌아보지 못한 이웃 나라들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려 하였다. 고려와의 관계에 있어서 명나라는 공민왕이 회복한 철령 이북의 땅을 다시 반납하라는 억지를 부리고 나섰다. 철령 이북의 땅은
원나라가 고려의 땅을 강제 점거하였던 쌍성총관부 지역으로 명나라는 이곳에 철령위를 세우면서 이전의 원나라의 땅이었던 지역은 모두 명나라의 소유라고 주장하였다.
최영과 그가 보호하고 있던 우왕은 명나라의 이러한 요구에 반발했다. 그리고 명나라 국초의 불안한 정국을 틈타 요동까지 정벌하자고 나섰다. 이성계는 최영의 의견에 반대했다.
이성계는 최영이 울분에 차 전투의 시기와 국제 정세를 잘못 읽고 있다고 판단하고, 요동정벌이 불가한 4가지 이유를 들었다.
그것은 여름철 농번기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부적당한 점,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라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쓰기 힘든 점, 요동을 공격하는 사이에 남쪽의 왜구가 침입할 우려,
그리고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의 의견은 군사에 정통한 장수로서 일견 타당한 부분도 있었으나 완강한 최영과 우왕에 의해 무시되었다.
결국 이성계는 우왕과 최영의 명을 받아 우군도통사가 되어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요동정벌 길에 올랐다. 그러나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들어가기 전 위화도에 주둔한
이성계는 큰 비를 만나고 더는 앞으로 나갈 수 없는 위기에 봉착하였다. 이대로 물에 빠져 죽을 것인가 군대를 돌릴 것인가의 기로에서 이성계는 조민수를 설득해 회군을 선택했다.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한 후 창왕을 세웠으며, 자신은 수시중으로서 도총중외제군사(都摠中外諸軍事)가 되어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였다.
다음해 정도전 등과 함께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세웠다. 1390년(공양왕 2) 삼사영사(三司領事)로 승진하였고, 1391년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로서 조준 등과 함께
구신(舊臣)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전제개혁(田制改革)을 단행하였다. 그 결과 구신들은 경제적 기반을 잃었고, 그의 일파인 신진세력은 경제적인 토대를 구축하게 되었다.
1392년(공양왕 4) 정몽주를 제거, 그 해 7월 공양왕을 양위시키고 스스로 새 왕조의 태조가 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태조 [太祖])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