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가뭄으로 고통 받던 조선에서 세종대왕(1397~1450)은 각 농가의 잠재적 수확량에 근거하여 토지세를 징수하고자 했다. 이러한 목적으로
국가 전역에 측우기가 설치되었고, 각 마을의 지방관은 강우량을 중앙정부에 보고했다.
1441년에 각 마을에 높이 17인치(43센티미터), 나비 7인치(17센티미터)인 표준적인 원통형 용기가 지급되어 석조 받침 위에 설치되었다. 측우기는
일정 기간 원통에 담긴 빗물의 깊이를 재는 데 사용되었으며 이 기구의 발명가는 과학자 장영실이었다.
이후 강우량을 재는 제도는 100여 년 동안 잘 시행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인한 사회의 혼란과 측우기의 유실 등으로 강우량 측정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러한 시기는 1세기 반 이상이나 계속되었으며, 조선의 문예 부흥기인 영조 때에 이르러서야 다시 체계화되었다. 1770년(영조 46년) 5월에
세종때의 기록에 충실하여 청동으로 측우기를 다시 만들었는데, 돌로 만든 대에는 측우대(測雨臺)라 새기고, 제작한 연·월을 기록해 놓았다. 현재 기상청에 보존되어
있는 것이 1770년에 만든 측우기 가운데 하나이다(현재는 측우대만 남아 있다).
우리나라의 측우기는 1770년부터 현재까지 240여 년간 연속적인 강우량 관측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이로서 18세기부터 21세기까지 우리나라의 강우량의 변화,
다시 말해서 연중 강우량, 가뭄, 홍수 등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기상의 변화를 미리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더 나아가 동북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 기상의 변화를
예측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자료가 되는 것이다.
세계의 과학 문화 유산으로 조선의 획기적인 발명품인 측우기는 1639년 이탈리아의 B.가스텔리(Benedetto Castelli)가 발명한 측우기보다 약 200년이나 앞선 것이다.
특히 강우량을 재는 과학적인 방법이 세계 어느 지역에서도 아직 싹트지 않았을 때 우리 조상들은 측우기를 만들고, 이를 전국의 관청에 설치해 조선의 강우량 통계
측정 체계를 확립하였던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세상을 바꾼 발명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