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현은 평범한 주부로 살다가 남편이 왜군과 전투 중 전사소식을 듣고 복수심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3대 독자 유복자인 아들과 시부모를 봉양하지
않을 수 없어 양잠을 하며 손수 명주를 짜서 내다 팔아 가계를 이어 나갔다. 지사의 나이 46세에 3ㆍ1운동이 일어나자 항일구국하는 길만이 남편의 원수를
갚는 길임을 깨닫고 같은 해 3월 9일 아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중국 요녕성 통화현에 망명하여 정착하였다. 그곳에서 비밀무장단체인 서로군정서에 가입,
군사들의 뒷바라지를 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북만주 일대에 농촌을 누비며 12개의 교회를 건립하였으며 여성계몽에도 힘써 10여 개의 여자교육회를 설립하여 여권신장과 자질향상에 주력하였다.
그녀는 군자금 모집, 독립운동가 옥바라지 등으로 만주지역 독립운동의 대모로까지 불리게된다.
만주 지역 무장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추진할 때 참가했으며, 무장 투쟁이나 테러 위주의 독립운동을 적극 후원하고 참여하였다.
1932년 만주국 수립으로 영국인 리튼이 이끄는 국제연맹의 조사단이 하얼빈에 오자 손가락을 잘라 '한국독립원'이라는 혈서를 써서 보낸 일화가 잘 알려져있다.
또한 1925년에는 당시 조선 총독부 총독 사이코 마코토 암살을 시도한 것으로 유명하다.
쉰이 다 된 나이에 항일 운동을 하며 만주 여걸로 이름을 알렸으며, 만주 지역에 여러 학교를 설립하여 항일 운동가를 양성하였고 일본군과 직접 맞서 싸우기도 하였다.
고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과 만주를 오가며 군자금 마련에 힘을 쏟았지만, 1933년 만주에서 일본 경찰 암살 시도로 일본군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으며 단식 투쟁을 벌이다 순국하였다.
자신보다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한 남자현 지사의 희생을 잊지 않고 우리도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이어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국가보훈처 공식블로그 (호국보훈 이야기 남자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