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왕의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는 백성들에게 정확한 시각을 알려 주는 것이었다. 왕은 백성들에게 일어날 시각과 일할 시간, 쉬는 시간 등을 알려 주어 일상생활의 리듬을 규제하고 통제함으로써 사회생활의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시계는 권위와 질서의 상징이었고 통치의 수단이었다. 옛날에는 시간을 측정하기 위해 주로 해시계와 물시계를 이용하였다. 해시계는 해 그림자로 태양의 위치를 파악하여 시간을 측정하는 것으로 낮에만 사용할 수 있으나, 물시계는 물의 증가량 또는 감소량으로 시간을 측정하기 때문에 24시간 작동이 가능하였다. 조선 세종 때에는 삼국시대부터 이용하던 물시계의 시각알림장치를 자동화하고 ‘스스로 치는 시계’라는 뜻으로 자격루를 제작하였다. 세종 임금의 명으로 장영실이 완성하였으며, 1434년경 회루남쪽보루각`報漏閣이라는전각에 설치하여국가의표준시계로 삼았다. 이시계는도성의성문을 열고 닫는 인정人定(통행금지 시각, 밤 10시경)과 파루罷漏(통금해제 시각, 새벽4시경), 오정午正(낮 12시)을 알려 주는 데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서울 사람들에게 아침·점심·저녁 때를 알려 주어 생활의 리듬을 잡아 주는 등 조선시대 사람들의 표준 시계가 되었다. 자격루의 시각을 알려 주는 인형이 치는 종소리와 북소리를 듣고 이를 신호로 광화문과 종루에서 북과 종을 쳐서 시각을 알렸으며, 이에 따라 궁궐의 문과 서울의 도성문인 숭례문`崇禮門, 흥인문興仁門, 돈의문`敦義門이열리고닫혔다. 자격루는 보루각에 설치하였기 때문에 보루각루`報漏閣漏, 임금이 거처하는 대궐에 있다고 하여금루`禁漏, 스스로 시간을 알리는 궁궐 시계라 하여 자격궁루自擊宮漏라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었다. 세종 때의 자격루는 그대로 보존되지 못하고 1536년(중종 31)에 다시 만들어졌는데 그 일부인 물항아리(파수호播水壺, 수수호受水壺)가 현재까지 남아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자격루, Self-Striking Water Clock)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