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법의 정신 몽테스키외&&다니엘 웹스터&&로큰롤의 제왕, 엘비스 프레슬리 출생 |
---|---|
등록일 | 2010. 1. 18. |
첨부파일 | 첨부파일없음 |
법의 정신 몽테스키외 1721년 당시의 프랑스를 풍자적으로 비판한 서간체 소설 '페르시아인의 편지'를 익명으로 출판했다. 재치 있는 기지와 기교에 넘친 이 작품으로 그는 곧 파리 사교계에서 유명해졌다. 그 후 그는 아카데미 회원에 선출되었고, 1728년부터 3년간 로마, 런던 등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여행했다. 이 여행의 성과를 바탕으로 그는 '로마인의 흥망성쇠 원인론(1734년)'등을 저술하고, 또 10여 년에 걸쳐 3개의 정체론과 권력 분립론 등을 특징으로 하는 '법의 정신(1748년)'을 완성했다. 이 책은 곧 교황청의 금서 목록에 올랐으나 2년 동안에 22판이나 찍었다. 그는 1755년에 파리에서 유행성 감기가 악화되어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개인의 자유는 국가권력이 사법 ·입법 ·행정의 3권으로 나뉘어 서로 규제 ·견제함으로써 비로소 확보된다고 하는 그의 3권 분립의 이론은, 왕정복고(王政復古), 미국의 독립 등에 영향을 주었고, 19세기의 자유주의가 옹호하게 되는 기본적 자유의 규정에 공헌하였다. 내가 성공한 원인은 오직 근면에 있었다! - 다니엘 웹스터 "내가 성공한 원인은 오직 근면에 있었다. 나는 평생에 단 한조각의 빵도 절대로 앉아서 먹지 않았다!" 미국의 정치가 웹스터(Webster, Daniel, 1782. 1. 18~1852. 10. 24)의 말이다. 뉴햄프셔 출생인 그는 하원의원·상원의원·국무장관의 요직을 역임하였고, 남북대립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남부 이론에 대항하여 북동부의 대변자 역할을 하였으며, 연방의 통일을 주장하였다. 뉴잉글랜드를 중심으로 한 제조업의 발전과 함께 보호관세론의 입장에서 1828년의 관세법에 대한 남부의 반대와 그 뒤의 '무효선언'논쟁에 대항하였다. 1830년 R.Y. 헤인과의 논쟁 속에서는 연방의 통일과 일체성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제2합중국은행의 특허갱신문제나 재정정책을 둘러싸고 잭슨대통령과의 대립이 심화되었으며, 뒤에 휘그당 결성 때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1842년 J. 타일러 치하의 국무장관으로서 웹스터-애슈버턴조약을 체결하여, 미국·캐나다 국경을 확정하였다. 연방분열을 저지한다는 점에서 '1850년의 타협'을 지지하였는데 반노예제파(反奴隷制派)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로큰롤의 제왕, 엘비스 프레슬리 출생 로큰롤의 제왕, 황제 등 수많은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그는 로큰롤을 세계에 알린 미국의 가수 겸 영화배우이다. ‘The Hillbilly Cat’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한 그는 힙을 흔들며 노래하는 독특한 무대 매너 덕분에 ‘Elvis the Pelvis’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동시대 가히 파격적인 그의 공연장면은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으며 텔레비전 방송 금지 요구 등 로큰롤이 청소년 비행의 원인이라고 까지 비화되기도 하였다. 그는 작사, 작곡은 하지 못하였지만 천부적인 끼와 재능을 겸비한 가수였다. 흑인의 불루스와 백인의 컨트리를 절묘하게 융합시킨 그의 노래들은 독특한 창법과 함께 항상 열광적인 팬들을 몰고 다녔다. 가장 성공한 아티스트로서 혹은 최다 히트 싱글기록(151회, 기네스 인정기록)을 가진 가수로서 비틀즈와 레드 제페린 에게까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유명하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레코드 판매량은 정확히 집계된 바는 없지만 1977년 6억매, 1985년 10억매 이상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2005년 미국의 경제지 포브스의 발표에 따르면 연간 인세 수입만 4500만달러로 5년 연속 세계최고 갑부 반열에 올랐다고 한다. |
이전글 |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 - 무하마드 알리&&독일의 식물학자겸 내과의사 푹스&&세계최초, 원자력 잠사함 노틸러스호 시운전 |
---|---|
다음글 | 미국 남부의 영웅, 로버트 리&&실증주의 창시자 콩트&&현대미술의 뿌리 세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