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미국 국•공립학교, 인종차별 금지 결정&&파리 음악원 낙제생, 젊은 음악가의 정신적 지주되다_작곡가 사티&&두창(천연두)를 치료한 영국 의학자, 제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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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10. 5.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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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국공립학교, 인종차별 금지 결정 20세기 중반, 미국의 뿌리 깊은 흑인차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획기적인 결정이 내려졌다. 1954년 5월 17일 미 대법원은 판결문을 통해 "백인과 흑인아동을 분리한 시설은 본질적으로 불평등하다"는 만장일치의 선언을 하고 과거 1896년부터 내려온 ‘분리된 평등’원칙은 앞으로 공립학교에서 사용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이같이 국·공립학교의 인종분리를 금하는 판결은 수많은 미국 내 공립학교의 아동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남부지역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나 얼 워렌 대법원장은 "공공 교육의 분야에서 인종차별의 원칙은 폐지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확고히 하였다. 파리 음악원 낙제생, 젊은 음악가의 정신적 지주되다_작곡가 사티 괴팍한 성격과 자유분방함을 오가며 여류화가 쉬잔 발라동과 열애에 빠지기도 하였던 파리 음악원의 낙제생 사티(Erik Satie, 1866. 5. 17 ~1925). 한때 카페의 피아니스트로 일하면서 미사곡을 작곡하기도 하였던 그는 20세기 프랑스 음악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주요 작곡가로서 평가받고 있다. 청년시절 교단의 정형화된 교육에 반발 학교를 그만두고 독학으로 작곡을 공부했던 사티는 1887년 이후 점차 알려지기 시작하며 파리의 몽마르트 주변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진보적인 예술운동에 동참했던 사티는 그를 따르는 젊은 음악가들에 의해 이상적인 작곡가로 받들어졌으며 훗날 그를 추종하는 그룹인 ‘아르쾨유악파’가 만들어지며 정신적인 지주로서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괴팍한 성격과는 달리 뛰어난 음악적 순발력을 보였던 사티는 때로는 음악적 패러디를 통해 당시 미술계를 풍자하기를 즐기기도 하였다. 사티의 작풍은 본질적으로 과장되지 않은 순수한 음악을 추구했으며 새로운 시도 속에 명료하고 본질적인 음악의 아름다움을 함께 표현한 진보적이고 뛰어난 걸작들을 많이 남겼다. 두창(천연두)를 치료한 영국 의학자, 제너 영국의 의학자인 제너(Edward Jenner, 1749.5.17~1823)가 시골마을의 의사로 일하던 당시, 영국은 두창이 자주 창궐하여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었다. 당시의 예방법은 증상이 가벼운 두창 환자의 농포로부터 추출한 액을 건강한 인간에게 주사하여 면역성을 주는 것이었지만 이 예방법은 자주 실패하여 오히려 예방 주사에 의해 두창에 걸린 인간이 사망하는 일이 자주 발생 하였었다. 새로운 예방법을 찾고 있던 제너는 농가에 옛 부터 전해지는 민간요법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즉, 두창에 비하면 훨씬 안전한 병인 우두에 걸린 인간은 그 후 두창에 걸리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에 관심을 갖고 연구한 결과 제너는 1796년 5월 14일 제임스 핍스(James Phipps)라고 하는 8세의 소년에게 우두를 주사했다. 소년은 우두에 걸려 6주일 후 회복했고 다시 소년에게 두창을 접종한 결과 소년은 두창에 걸리지 않았다. 이 방법에 대한 확신을 가진 제너는 1798년 종두법을 발표 하였고 이 획기적인 새로운 예방법은 곧 전 유럽으로 퍼져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1802년 영국 의회에서는 제너의 공을 높이 평가하여 상금을 내렸고 이듬해 런던에 우두접종 보급을 위한 왕립제너협회가 설립되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무료로 접종을 해주었다. 제너의 백신은 좀 더 안전한 방법으로 개량되어 전 세계로 보급되었고 그 결과 1980년 인류는 두창의 완전정복을 선언 할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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