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우체국 각 서비스 바로가기 우표포털 본문내용 바로가기 우표포털 하단 바로가기

한국우표포털서비스 K-stamp

  • 우표배움터

    • 우표의역사
    • 즐거운우표수집
  • 우표정보

    • 한국우표
    • 세계우표
  • 우표시장

    • 우표장터
    • 온라인 구매
    • 오프라인 구매
  • 우표문화체험

    • 우표박물관
    • 우표전시회
  • 우표로보는세상

    • 해외우취소식
    • 우편 130년
    • 우표 명작을 말하다
    • 우정이야기
    • 우표수집정보
    • 시간여행
    • 우표디자이너 인터뷰
    • 우표 뒷이야기
    • 대한민국 방방곡곡
    • 우정문화웹툰
  • 어린이 우표세상

    • 우표야놀자
    • 청소년 우표교실
    • 우정문화 동영상
    • 우표배경화면
  • 인기
우표스쿨 우표갤러리 우표 샵 우표박물관 우표로 보는 세상 쥬니어 스탬프

지난 시간여행

인물과 역사를 바로 알고 현재 우리의 모습과 비교해 봄으로써 선조들의 지혜를 알아 봅시다.

지난시간여행
제목 한산도대첩&&미국의 사업가 록펠러&&자기학과 저온물리학의 대가
등록일 2010. 7. 8.
첨부파일 첨부파일없음

2010년 7월 8일

한산도대첩

한산도대첩 내용시작 1592년(선조 25)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는 왜군 수군에게 지옥과 같은 곳이었다. 지금의 경남 통영시 앞바다인 한산만은 거제도와 통영만 사이에 있는 좁고 긴 수로인 견내량을 지나 당시 무인도인 한산도 주변에 넓게 펼쳐진 만으로서 좁은 수로에서 정신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적함들을 포위 공격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당시 왜군은 연이은 해전에서의 패전을 만회하고자 제1진 와키사카 야스하루의 70여 척을 선두로 구키 요시타카의 제2진 40여 척과 제3진의 가토 기요마사의 연합함대를 투입하였다. 그러나 사상 최대의 연합함대를 동원한 왜군은 자만심에 도취되어 이순신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유인책에 말려들었다. 당시 주변지형과 해로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적정에 대한 정보 수집을 바탕으로 치밀한 전략을 세우고 대비한 조선수군에게 왜장 와키사카의 제1진 70여척이 달려들었고, 미리 파놓은 함정에 휘말려 압도적인 화포의 화력으로 무장한 이순신 장군의 함대에게 무참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순식간의 해전으로 격침된 일본 함선은 66척이었고, 목을 잘라 온 것이 86급, 기타 물에 빠지거나 찔려서 죽은 수가 수백 명에 이르렀으며, 한산도로 도망친 400여 명은 군량이 없이 13일 간을 무인도에 표류하여 굶주리다가 겨우 탈출하였다. 행주대첩, 진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로 불리는 이날 해전으로 일본 수군의 주력은 거의 전멸하였으며, 일본군의 수륙병진작전에 제동이 걸리며 남해의 제해권을 조선 수군이 확실히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의 사업가 록펠러

미국의 사업가 록펠러 내용시작 뉴욕주 출생의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1839.7.8~1937.5.23)는 1859년 친구와 함께 상사회사(商事會社)를 설립하고, 1863년 부업으로 클리블랜드에 정유소(精油所)를 설립해 커가란 이문을 남기며 1870년 자본금 100만 달러의 주식회사 형태를 갖춘 오하이오스탠더드석유회사가 설립하였다. 사장으로 취임한 록펠러는 수완을 발휘해 급속히 사업을 확대하여 나갔으며 1882년에는 미국 내 정유소의 95%를 지배하는 스탠더드오일트러스트를 조직하였다. 1899년 오하이오의 주재판소로부터 셔먼독점금지법(반트러스트법) 위반의 판결을 받자 뉴저지주(州)에 지주회사를 설립해 세계적인 석유회사로서 입지를 굳힐 수 있었다. 그러나 1911년 미국 연방최고재판소로부터 다시 한 번 반(反)트러스트법 위반으로 해산명령을 받고 회사가 해체되자 록펠러는 재계에서 물러나 자선사업가로 변신하였다. 1890~1892년 시카고대학 설립과 운영을 위해 4억 달러 이상을 기부하였고, 록펠러재단(1913년 설립), 일반교육재단, 록펠러의학연구소 등을 설립하는 등 여생을 자선사업에 몰두하였다.

자기학과 저온물리학의 대가

자기학과 저온물리학의 대가 내용시작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생의 물리학자 카피차(Pyotr Leonidovich Kapitsa, 1894.7.8~1984.4.8)는 자기학과 저온물리학에 대한 연구로 1978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1925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의 특별연구원이 되었고, 1929년 외국인으로서는 드물게 왕립학회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932년 특별히 그를 위해 케임브리지에 왕립학회 몬드 연구소가 설립되었다. 헬륨을 액화시키는 팽창기관에 대한 그의 논문을 출판하기 전인 1934년 그는 소련에서 열리는 물리학 회의에 참석하러 갔는데 거기서 여권이 압수되었고 스탈린의 명령에 의해 억류되었다. 1935년 모스크바에 있는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물리문제연구소의 소장으로 임명되었고 러더퍼드의 중재를 통해 몬드연구소에 있던 기구들을 모스크바로 실어오게 했다. 그는 저온 물리학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고 헬륨 Ⅱ의 열전도 특성을 연구하던 중 그것의 초유동성을 발견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중 소련의 강철 산업을 위해 액체 산소를 대량으로 만들 수 있는 기구를 만들었다. 1930, 1940년대에 그의 과학적인 업적에 대해 소련 정부는 사회노동당 영웅의 칭호(1945)와 소련 최고 시민상을 포함해 많은 명예를 얻기도 하였다. 1946년 그는 핵무기 개발에 관한 연구를 거절함으로써 스탈린의 미움을 샀고 물리문제연구소 소장직에서 해임되었으며, 1953년 스탈린이 죽은 후까지 시골집에 거주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시간여행 이전글 다음글 보기
이전글 경부고속도로 개통&&프랑스 발명가 자카르&&표현주의의 대가 샤걀
다음글 퍼그워시 성명&&재봉틀발명가 하우&&오르간 제작자 슈니트거

기 발행된 모든 우표류(우표, 엽서, 원화, 우표책, 우표첩, 날짜도장)의 이미지 및 내용을 사용할 수 있으나, 이미지와 내용을 변경하여 사용시에는 우정사업본부의 승인을 받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