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 11일
한국해군 모체 해방병단 창설 /해군창설기념일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자 대한민국 해군 창설자인 손원일 제독은 조국의 해양수호에 관심이 많은 선각자 30여명과 함께 1945년 8월 21일 해사대(海事隊)를 결성하였으며, 11월 11일에 서울 안국동 표훈전에서 “해방병단”을 창단하여 1946년 1월 18일 미 군정청의 정식 군사단체로 인정받았다.
이로 인해 해방병단은 해군의 모체가 되었으며, 11월 11일을 현재까지 해군 창설일로 기념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휴전협정 조인 - 제1차 세계대전 종전
1918년 11월 11일 동맹국과 연합국으로 대립한 제1차 세계대전의 휴전협정이 조인됨으로써 4년간 계속되어온 전쟁이 막을 내렸다.
1914년 6월 28일 남부 슬라브족의 '해방'을 위해 사라예보를 순방 중이던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세르비아 청년에게 암살당함으로써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간의 갈등이 폭발했다.
이 사건은 각국의 이해와 맞물려 제1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연합국은 500만 명의 전사자를 포함해 2,200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으며, 동맹국은 330만 명의 전사자를 포함해 1,500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전쟁 중 굶주림이나 질병, 또는 대량 학살 등으로 많은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는데 군인 전사자보다 많은 1,300만 명가량으로 추정된다.
이 전쟁에서 동맹국측인 터키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이 차례로 몰락했고, 독일은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평화협정에 합의했다.
이로써 제1차 세계대전은 프랑스·영국·러시아·이탈리아·일본·미국이 주도한 연합국측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무리한 참전은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는 결과를 낳았고, 유럽의 불안정은 제2차 세계대전의 불씨가 되었다.
미국의 군인, 장군 패튼(Patton, George Smith, 1885~1945) 출생
캘리포니아주 산가브리엘 출생. 1909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1917년 제1차세계대전에 참전, 초창기 전차부대 편제를 구성하는 임무를 맡아 공을 세웠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뒤 1942년 북아프리카 상륙작전에 참가하였고, 1943년에는 미군 제7군사령관으로 시칠리아섬 전역을 신속히 장악하는 전공을 세웠다.
1944년 여름 노르망디상륙작전에서는 전통적인 작전법을 무시한 전격적 공격으로 프랑스 중부 전역을 제압하였으며 그해 12월에는 불주대전투에서 바스토뉴를 방어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1945년 3월 독일로 진격, 라인강을 돌파하는 데 성공한 뒤 4월 말에는 독일 남부, 체코슬로바키아 서부, 오스트리아 서부를 차례로 점령하는 성과를 올렸다.
독일이 항복한 뒤 바이에른지방 군정장관에 임명되었으나 전후 연합군의 비(非)나치스화 정책을 비판하여 군정장관 및 제3군사령관 직위를 박탈당하였다.
용맹하고 저돌적인 지휘자로 평가받은 반면, 병사 구타와 같은 실수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 저서로 “내가 알고 있었던 전쟁(1947)”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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