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 5일
한국, UN 식량농업기구 가입
국제연합 식량농업기구(國際聯合食糧農業機構, Food and Agriculture Organization of the United Nations)는 개발도상국의 기근과 빈곤을 제거하기 위해 1945년 설립된 국제연합 전문기구로서 FAO라는 약칭으로 통용된다.
FAO는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의 제창에 의해 개최된 식량농업회의를 모체로, 1945년 10월 캐나다 퀘벡에서 소집된 제1회 총회에서 34개국의 헌장서명으로 발족하였으며, 세계농업발전의 전망 연구 및 각종 기술원조계획, 농업/임산물/어업 등에 관한 통계연감 발행, “세계식량계획(World Food Program)” 설립 등을 주요활동으로 한다.
한국은 1949년 11월 5일 가입하였으며, 1953년에 'FAO와 대한민국 간의 기술원조에 관한 기본협정'을 체결했고, 동시에 'FAO 국제식물보호협정'에 가입했다.
유혈사태 없었던 시민혁명, 영국 명예혁명
의회정치 발달의 기초를 확립하는 계기를 마련한 영국의 명예혁명(名譽革命, Glorious Revolution, 1688~89년)은 제임스2세의 폭정에 불만을 품은 시민혁명으로써 유혈(流血)사태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명칭이 붙게 되었다.
1685년 왕위에 오른 제임스 2세의 가톨릭교 부활정책과 전제주의, 상비군 설치 등으로 국민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이에 영국의회는 영국의 자유와 권리를 수호하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네덜란드 총독 윌리엄, 메리 부처를 초대 하였다.
그들은 1만 5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영국 남서부에 상륙하여 런던으로 진격하며 국내 귀족과 지방호족들 진영 합류를 이끌어 내었으며, 이들을 물리치기 위해 왕이 파견한 처칠도 왕을 배반하고 윌리엄 진영에 투항하고, 왕의 둘째딸 앤도 윌리엄군(軍)에 가담하였다.
이렇게 되자 왕은 국외로 망명할 것을 결심하고, 왕비와 왕자를 프랑스로 도피시킨 뒤 그도 뒤따라 망명하였다.
런던에 입성(入城)한 윌리엄 부처에게 1689년 2월, 의회에서는 ‘권리선언(權利宣言)’을 제출하여 승인을 요구하였다. 부처는 그것을 인정한 다음, 윌리엄 3세, 메리 2세는 공동으로 왕위에 올랐다.
‘권리선언’은 뒤에 ‘권리장전(權利章典)’으로서 재차 승인을 받았다.
이 장전의 원칙에 나타나 있듯이, 이 혁명은 17세기의 왕권과 의회의 항쟁에 종지부를 찍게 하였고, 종래 의회의 권리를 수호함과 동시에 왕위계승까지도 의회가 결정할 수 있게 하여, 그 뒤 의회정치 발달의 기초를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노벨화학상]프랑스 유기화학자, 사바티에
프랑스의 유기화학자 사바티에(Sabatier Paul, 1854. 11. 5~1941. 8. 14)는 1912년 유기촉매 합성에 대한 연구, 특히 수소화반응에서 니켈을 촉매로 사용하는 방법을 발견한 공로로 빅토르 그리냐르(Victor Grignard, 1871.5.6~1935.12.13)와 함께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1884년 툴루즈대학 교수로서 물리학을 가르치며, 물리학과 화학의 경계 영역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1897년 J.B.상드랑과 함께 환원니켈을 접촉제로 하고 벤젠에 수소를 첨가하여 쉽게 시클로헥산을 얻는 데 성공하였다.
그로부터 여러가지 환원금속을 써서 유기화합물 전반의 접촉환원을 계통적으로 연구하여 유기화학에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였다.
이 방법으로 마침내 경화유공업은 확고한 이론적 기초를 마련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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