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18일
헌정사상 첫 정권 교체, 제15대 대통령 김대중 당선
1997년 12월 18일 야당의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정부 수립 후 50년 만에 처음으로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루어 졌다.
김대중은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선거 부정 의혹이 제기되는 가운데 박정희 후보에게 95만 표차이로 패배했다.
10월유신 이후 반유신운동을 전개하며 온갖 시련을 겪었고, 1980년에는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기도 하였다. 김대중은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의 여파로 사면복권된 후, 12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과의 야권 후보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채 선거에 출마했다가 노태우 후보에게 패했고, 1992년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도 여당 후보로 탈바꿈한 김영삼 후보에게 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이후 그는 정계은퇴를 선언했다가 1997년 다시 새정치국민회의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이 선거에서 자유민주연합의 김종필 총재와 대통령 후보단일화를 성사시킴으로써 여당인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근소한 표차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위대한 인물은 조국의 생명의 피가 되어야 한다! - 이준
한말의 항일애국지사였던 이준(李儁, 1859.12.18~1907.7.14)은 함경남도 북청(北靑)에서 출생하였다.
29세에 북청에서 초시(初試)에 합격한 후, 1894년(고종 31) 함흥 순릉참봉(純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상경하여 이듬해 신설된 법관양성소(法官養成所)에 들어가 6개월 후에 졸업하고, 1896년 한성재판소(漢城裁判所) 검사보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조신(朝臣)들의 불법과 비행을 들추어 파헤치다가 그들의 면관(免官) 운동 때문에 취임 1개월 만에 면직되고 곧 독립협회에 가담, 평의장(評議長)으로 활약하다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907년 6월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밀령(密令)으로 이상설(李相卨)·이위종(李瑋鍾) 등과 합류, 헤이그에 도착했으나 일본측의 방해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고 순국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영화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 스필버그
사상 최고의 흥행 성적을 거둔 영화를 감독, 제작, 기획한 인물로, 영화계에서 가장 성공했고 영향력이 큰 인물로 불리우는 미국의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 1946.12.18~).
그는 유대계 출신으로 캘리포니아대학을 졸업하고 텔레비전 영화감독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슈가랜드 특급'으로 영화계 정식 데뷔해 '쥬라기 공원', 'ET', '터미널', '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성전', '후', '영혼은 그대 곁에' 등 귀에 익은 많은 영화들을 만들었다. 최근에는 '우주 전쟁', '뮌헨'을 감독했고, '게이샤의 추억'을 제작하기도 한 스필버그는 '뮌헨'으로 감독상과 작품상 등 아카데미 5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고, '게이샤의 추억'으로 아카데미 의상상, 촬영상, 미술상을 받았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로 아카데미 감독상, 촬영상, 음향상, 편집상, 음향효과상, 골든글로브 감독상과 작품상을 받았고 미국 감독협회상, 영화 제작자협회상과 미국 영화의 역사적 공헌도를 인정하는 ‘마일스톤상’을 수상했다.
또한 1994년의 '쉰들러 리스트'로 작품상과 감독상을 비롯해 아카데미 총 7개 부문을 휩쓸고 골든 글로브상과 미국 감독협회상을 받았다.
2000년에는 미국 정부로부터 평생공로상과 미국 영화연구소 제정 평생공로상과 영화예술과학 아카데미 어빙 G. 탈버그상을 받았다. 수상경력만으로도 20~21세기 영화계의 우상으로 불리어질 만한 스필버그의 지칠줄 모르는 행보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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