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柳寬順, 1902-1920) 열사는 1914년 미국인 선교사 사애리시(史愛理施, Alice H. Sharp, 1871~1972) 부인의 추천으로 공주영명여학교 보통과에 입학했다. 1916년에 영명여학교 2년을 마치고 서울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교비생으로 편입했다. 1918년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한 이듬해 3‧1운동이 일어나, 3월 5일 서울에서 학생단 시위운동에 친구와 함께 참여했다가 일제의 경무총감부에 붙잡혔다 풀려났다.
3월 10일 휴교령이 내리자 유관순은 귀향하여 천안에서 아우내 장터 만세시위운동을 준비하였다.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 오빠 유우석과 함께 시위를 주도하다 일본 헌병대의 공격으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사망했다. 체포된 유관순은 5월 9일 공주법원에서 5년 형을 선고받고 경성복심병원에 항소하여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다.
1920년 3월 1일 유관순은 서대문감옥에서 다시 옥중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그해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모진 고문 끝에 방광 파열로 서대문감옥에서 순국했다. 나이 19세의 꽃다운 청춘이었다. 10월 12일 이화학당에서 유관순의 시신을 인수하고, 14일 정동교회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어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이후 일제의 군용기지 전환으로 망우리 공동묘지 이장 과정에서 없어져 1989년 천안 매봉산 기슭에 초혼묘(招魂墓)를 봉안하였다.
유관순 열사 유적지(천안시 병천면 탑원리 252)에는 기념관, 추모각, 동상, 초혼묘, 봉화탑, 기념공원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201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유관순 열사의 영정은 1986년 장우성 화백의 작품을 표준영정(제15호)으로 지정하고 추모각에 봉안하였다. 이 영정은 유 열사의 실제 사진을 보고 그렸으나 감옥에서 고문으로 얼굴이 부풀어 올라 흉해진 얼굴 그대로를 그려 16세의 소녀 모습이 아닌 중년 여성처럼 보인다는 비판과 화가의 친일행적 논란이 불거져 교체를 추진하였다.
2007년 새롭게 제작되어 문화관광부의 표준영정(제78호, 2007.2.6.)으로 지정된 영정(120×200cm)은 윤여환 작가의 작품으로 비단 바탕에 육리문법으로 채색되었다. 추모각에 봉안된 영정은 3‧1운동 당시 만세운동을 벌이기 전 나라를 걱정하는 표정과 의기에 찬 모습으로 이화학당 교실 마루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흰색 치마저고리, 갖신 등 복식과 마룻바닥 등 철저한 고증을 거쳐 재현했다. 육리문법(肉理文法)은 얼굴을 그릴 때 사용하는 세필인 면상필로 일일이 붓질을 해 얼굴 근육 조직과 살결을 따라 선과 점을 표현해 피부 질감을 땀구멍까지 생생하게 그려내는 기법이다.
우정사업본부에서는 올해 유관순 열사 순국 100주년을 맞아 순국일인 9월 28일 두 종의 우표를 발행할 예정이다. 2,480원권(등기우편 요금)의 소형시트에는 새롭게 지정된 윤여환 화백의 표준영정이 디자인 되는데 비단 바탕에 그린 표준영정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실크용지가 사용된다. 실크용지(silk-gummed paper)사용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이다. 1982년 보통우표로 발행된 류관순 우표는 이전의 장우성 화백이 그린 표준영정을 디자인한 것이어서 두 영정을 비교해 볼 수 있다.
유관순 열사의 이름이 우표에 ‘유관순’과 ‘류관순’으로 표기되어 있다. 유관순은 고흥 류씨다. 2007년 대법원의 호적예규에 따라 류씨의 성은 한글로 ‘류’로 쓸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 ‘유’를 쓰다 ‘류’로 바꾸었으나, 두음법칙에 따라 오랫동안 교과서 등에서 ‘유관순’으로 표기해 와서 2014년부터 ‘유관순’으로 표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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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유관순열사기념관( https://www.cheonan.go.kr/yugwansun/)
· 윤여환 미술관(https://blog.naver.com/yhyun7070/2215732145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