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초 한 장 주세요”
우체국에 가서 이렇게 말하면 우초를 아는 우체국 직원이 과연 있을지 모르겠다.
‘우초’는 1884년 11월 18일(음력 10월 1일) 우리나라 최초 우체국인 우정총국(郵征總局)이 문이 열린 날 발행된 5文 우표에 쓰인 말이다.
우리나라 최초우표인 5문 우표에는 맨 위에 ‘오문’과 함께 한자로 ‘大朝鮮國郵鈔’(대조선국 우초)라 쓰고, 가운데에 ‘五文’, 맨 아래에 ‘5MN’과 함께 한글로 ‘죠션국우초’ 라고 쓰여 있다. 여기서 ‘文’이라는 것은 당시 화폐단위를 말한다. 이런 연유로 최초우표를 ‘文’ 단위의 액면이 있다고 하여 속칭 ‘문위우표’라고 한다.
근대 우편이 창설될 당시인 1884년(고종 21년) 9월 25일(음력 9월 1일) 편찬된 ‘大朝鮮國郵征規則’(대조선국 우정규칙) 제5장 郵鈔(우초)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제27조 郵征鈔標(우정초표)는 반드시 우정본국에서 발행한다.
제28조 우초의 매매는 반드시 郵征總辦(우정총판)의 허가를 받고 ‘郵征鈔標賣下所’(우정초표 매하소)라는 일곱 글자가 적힌 간판을 문 앞에 건 후에 비로소 매매가 가능하다. 허가를 받지 않고 사사로이 매매할 수 없다.
제29조 우초의 매매가는 우초 印面(인면)에 표기된 액면보다 높거나 낮게 팔 수 없다.
제30조 우초 인면이 오염된 얼룩이나 훼손된 것이나 소인의 흔적이 있는 것은 모두 사용할 수 없다.
근대 우정은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서 일어난 갑신정변의 실패로 폐지되었다. 하지만 현재의 우편법에 해당하는 대조선국 우정규칙(전문 7장 46조)은 당시 우정 업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다. 근대 우편제도는 처음 도입되면서 일본의 驛遞局(역체국) 영향을 받았으나, 새로운 규칙을 만드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본에서 들여오는 만큼 우체 용어도 빌려 쓸만한 데 그렇지 않은 것이 많다.
우표는 우정초표(郵征鈔標, 우초), 우편은 우정(郵征), 우체국은 우정국(郵征局), 우편물은 우정물(郵征物), 우편요금은 우정세(郵征稅), 특사배달은 별분전(別分傳), 우편함은 우정괘함(郵征掛函) 또는 우정상(郵征箱), 우편자루는 우낭(郵囊), 우체부는 우체군(郵遞軍), 등기(登記)는 등기(謄記)로 표현했다. 그밖에 집신(集信), 분전(分傳) 따위의 독창적 용어도 만들었다.
우표를 말하는 우초(郵鈔)의 ‘鈔’ 자에는 ‘베끼다’와 ‘紙幣’, ‘紙錢’(종이돈), ‘영수증’의 의미가 담겼다. 收鈔(수초)는 ‘돈이나 재물 따위를 수납함’, 交鈔(교초)는 ‘중국 金과 元 나라의 지폐’를 뜻하는 말로써, ‘鈔’라는 말에 유가증권의 의미가 있다.
‘우정’의 한자는 지금은 ‘郵政’이라고 쓰지만, 당시는 ‘郵征’이라고 썼다. ‘征’에는 ‘징수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에 대해 진기홍 선생(1914~2010)은 “‘세를 받는다’는 뜻을 생각할 때, 요금을 받고 信書(신서)를 전달한다는 의미에서 郵征이라 쓴 것으로 보인다”며 “임금이 통치하던 시대 ‘다스린다’는 뜻의 ‘政’을 버리고 ‘征’을 택한 것은 그 자체로 획기적이며 민주주의적 의미가 있다”고 해석했다.
우리나라 최초 우표는 5종을 일본 대장성에 제작을 의뢰하였으나, 우정총국이 개국한 고종 21년(1884) 11월 18일에 5문과 10문 두 종만 도착하여, 그해 12월 8일 우정총국이 폐쇄될 때까지 20일간 漢城(서울)과 濟物浦(인천) 사이에 오간 우편물에 사용되었을 뿐이다. 5종 중 나머지 25, 10, 100문의 3종 우표는 우정총국이 폐쇄된 이듬해인 1885년 3월에야 도착하여 발행되지 못했다.
최초 근대 우정은 1884년 11월 18일부터 12월 7일까지 20일간만 운영되고 폐쇄된 후, 10년이 지난 1893년 9월 26일에야 재개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