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광화문에 월대가 복원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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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24. 3. 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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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대(月臺)는 ‘달을 바라보는 대(臺)’라는 월견대(月見臺)에서 유래된 말이다. 궁궐의 정전(正殿)과 같은 주요 건물 앞에 설치하는 넓은 기단 형식의 대를 말한다. 대개 1m 정도 높이의 장방형(長方形) 넓은 단(壇)으로, 2단으로 구성되는 경우도 있다. 벽면은 장대석(長臺石)을 가지런히 쌓아 올리고, 바닥은 전(磚, 벽돌)이나 박석(薄石, 넓고 얇게 뜬 돌)을 깔며, 모서리에 향로나 드므(제물을 담아두는 넓적한 독)를 올려놓기도 한다. 지붕이나 다른 시설은 하지 않는다. 월대는 궁중의 하례(賀禮)·가례(嘉禮)·제례(祭禮)와 같은 큰 행사가 있을 때 이용된다. 백성들이 올라서서 행사에 참여하고 왕과 소통하는 장소다. 조선시대 궁궐의 외정전(外正殿)과 내정전(內正殿) 앞, 종묘(宗廟) 정전과 영녕전(永寧殿) 앞에서 그 실례를 볼 수 있다. 조선 왕조 법궁(法宮)인 경복궁은 1395년(태조 4) 기본구조를 갖췄다. 그 정문인 광화문은 1399년 경복궁 둘레에 궁성을 쌓을 때 세웠다. 처음에는 ‘사방에서 어진 이가 오가는 정문’을 뜻하는 사정문(四正門)이라 하였다. 1425년(세종 7) 집현전 학사들이 ‘왕의 큰 덕이 온 나라와 백성을 비춘다’는 뜻이 담긴 ‘광화문(光化門)’이라 불렀다. 광화문은 임진왜란 때 훼손된 것을 1865년(고종 2) 흥성대원군(興宣大院君, 1821~1898)이 경복궁 중건당시 재건했다. 1927년 일제강점기 문화말살정책으로 광화문은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建春門) 북쪽으로 옮겨졌다. 1968년 석축 일부를 수리하고 문루를 목재가 아닌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중건했다. 이후 경복궁 복원 공사와 함께 해체되어 본래의 제자리를 찾아 2010년 고종 때 모습인 목조로 복원되었다. 2009년 광화문 앞 옛 육조거리(六曹街)가 도로 가운데에 남북으로 조성했던 광화문 광장이 재공사를 거쳐 2022년 새로 개장했다. 2023년 10월에는 광화문 앞 월대가 복원되었다. 현판도 고종 때 경복궁 중건 당시 훈련대장이었던 임태영(任泰瑛)이 한자로 쓴 금색 글씨로 바뀌었다. 고종 때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남긴 기록인 ‘영건일기’(營建日記)에는 1866년 3월 3일 ‘광화문 앞에 월대를 쌓았다’는 내용이 있다. 조선시대 월대 가운데 유일하게 기단을 쌓고 난간석을 둘러쌓았다. 남북 48.7m, 동서 29.7m 규모로 광화문 중앙문과 이어지는 왕의 길인 어도지의 너비는 약 7m다. 어도(御道) 앞부분 끝에는 서수상(瑞獸像) 두 점을 남쪽을 바라보게 배치하였다. 광화문 월대는 일제강점기였던 1920년대에 전차 선로를 부설하면서 훼손 되었다. 월대 가장 앞부분에는 서수상이 장식되었으나, 선로를 놓으며 제자리를 떠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수상은 당시 사용된 난간석(欄干石)과 하엽석(荷葉石, 연꽃무늬 돌) 등 월대 부자재를 재사용하여 복원하였다. 기존 광화문 옆에 있던 해태(해치)상도 복원된 월대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서수상은 한 시민이 호암미술관에서 발견하고 문화재청에 제보하면서, 고 이건희(李健熙, 1942~2020) 삼성그룹 회장이 수집한 소장품을 기증받았다. 서수상과 해치상이 제자리를 차지하면서 월대가 더 멋지게 느껴진다. 광화문은 남대문과 함께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문으로 우표에 담기는 경우는 1972년 ‘아시아 태평양 이사회 7차 각료회의’나 2010년 ‘서울 G20 정상회의’와 같이 대한민국 정부의 큰 행사가 있을 때다. 2021년에는 상월대(2층) 전후좌우에 왕을 수호한다고 알려진 사신상으로 용과 함께 주작, 기린, 해치가 궁궐의 신비로운 동물 우표로 발행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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