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11월 1일, 광주를 떠난 통학 열차가 나주역에 도착했다. 열차에서 내린 일본인 남학생이 조선인 여학생을 희롱하자, 여학생의 사촌 동생 박준채(朴準埰)가 항의하면서 조선과 일본 학생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당시 현장에 있던 학생 간의 패싸움으로 번진 이 사건은 결국 나흘 뒤인 11월 3일 광주에서 학생들의 시위로 번졌다. 이날 시위는 전국 194개교에서 5천400여 명의 학생이 참가, 3.1운동 이후 최대의 항일 운동으로 발전했다.
국가기념행사
학생의 날은 수차례의 부침을 거듭하면서 다양한 의미와 상징성이 부여되었다.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초기에는 항일과 독립운동, 애국정신 같은 의미가 강조되었으나, 박정희 군사정부 아래에서는 반공정신이 강조되었다. 한동안 폐지되었던 학생의 날은 1984년에 부활되었으나 방치된 것과 다름없었다. 이와는 다른 흐름으로 학생의 날의 의미와 의의를 반독재와 민주화운동으로 해석하고 실천하려는 활동이 있었다. 학생의 날은 다시 국가기념일이 되었으나 기념 행사는 ‘광주학생독립운동동지회’ 같은 민간단체 주관으로 진행되었다. 광복 제50주년을 맞이하면서 광주광역시교육청이 기념 행사를 공동 주관하면서 다소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기념식은 주로 광주제일고등학교에서 개최되었다. 1999년에는 학생의 날 기념식이 가장 성대하게 이루어졌다. 처음으로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이 개최되었던 것이다. 이해의 기념식은 개식선언(開式宣言), 국민의례, 교육부장관의 식사(式辭), 학생독립운동동지회장의 기념사, 대통령의 치사 순으로 진행되었다. 이날 행사에는 당시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전국의 194개 학교 가운데 북한 지역의 학교를 제외한 남한 지역 69개 학교 가운데 63개 학교의 대표와 기수단이 참여했다. 하지만 1929년 광주에서 시작되어 이듬해 전국을 거쳐 해외로 확산되었던 국내 3대 독립운동 중 하나인 학생독립운동이 1953년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었다가 1972년 제외되어 ‘광주의 일’로 축소됐던 적이 있다. 다행히 2006년 다시 회복되어 현재는 전국적으로 행사를 치르고 있다.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이 43년이 지난 뒤에 기념일에서 빠졌던 것은 해방 이후 친일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래에 들어서는 학교 또는 교육 관련 단체 주관으로 학생의 날을 기념하는 행사들이 다채롭게 진행되면서 항일정신뿐만 아니라 학생 자치 능력의 향상과 학생들의 권리 보장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학생독립운동 기념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