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우체국 각 서비스 바로가기 우표포털 본문내용 바로가기 우표포털 하단 바로가기

한국우표포털서비스 K-stamp

  • 우표배움터

    • 우표의역사
    • 즐거운우표수집
  • 우표정보

    • 한국우표
    • 세계우표
  • 우표시장

    • 우표장터
    • 온라인 구매
    • 오프라인 구매
  • 우표문화체험

    • 우표박물관
    • 우표전시회
  • 우표로보는세상

    • 해외우취소식
    • 우편 130년
    • 우표 명작을 말하다
    • 우정이야기
    • 우표수집정보
    • 시간여행
    • 우표디자이너 인터뷰
    • 우표 뒷이야기
    • 대한민국 방방곡곡
    • 우정문화웹툰
  • 어린이 우표세상

    • 우표야놀자
    • 청소년 우표교실
    • 우정문화 동영상
    • 우표배경화면
  • 인기
우표스쿨 우표갤러리 우표 샵 우표박물관 우표로 보는 세상 쥬니어 스탬프

일화로 보는 우편 130년

일화로 보는 우편 130년 콘텐츠는 한국 우편에 대한 역사를 소소한 이야기로 풀어내는 공간입니다.

일화로 보는 우편 130년
제목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 문위우표의 얄궂은 운명
등록일 2014. 1. 22.
첨부파일 up20140122182812538.jpg
첨부파일
근대우편의 특징은 우표를 우편 이용의 기본 수단으로 삼고 출발했다는 점이라 할 수 있다. 1884년 10월
1일(양력 11월 18일) 조선 정부는 우정총국이라는 기구를 설치하고 서울과 인천 두 지역에서 우편업무를
개시했는데, 이때 처음 우표를 발행했다. 5문, 10문, 25문, 50문, 100문 등 다섯 종의 우표였다. 우표의
액면 금액이 당시에 통용된 화폐 단위인 ‘문(文)’으로 표시되어 있어, 뒷날 우표수집가들이 그들 우표에
‘문위우표(文位郵票)’라는 이름을 붙였다. 당시에는 우표를 ‘우초(郵鈔)’라 했다.
문위우표는 일본 대장성 인쇄국에서 인쇄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우표를 인쇄할 시설이나 기술이 없어
1895년에 발행한 태극우표까지는 외국에 맡겨 인쇄했다. 문위우표의 도안으로는 태극 문양을 디자인해
보냈으나 일본에서 다시 디자인한 바람에 이도저도 아닌, 이상한 모양의 우표가 되었다. 이 우표의
디자이너는 일본인 사이토(齋藤知三)로 알려져 있다.
문위우표는 우리나라에서 우편업무를 처음 개시한 날인 1884년 10월 1일에 맞춰 발주했다. 다섯 종의
우표 가운데 5문과 10문 우표는 개시일 이전에 도착했으나, 나머지 세 종의 우표는 이듬해 3월에 뒤늦게
도착했다. 우정총국이 업무를 개시한 지 20일 만에 문을 닫았으므로 실제로 사용한 우표는 5문과 10문
두 종에 불과했다.
당시에 취급한 우편물은 일반 편지, 관보 및 서적 두 종류로 비교적 단순했다. 우편요금은 거리의 멀고
가까움을 가리지 않고 동일한 요금을 받았는데, 편지는 1돈쭝(錢重)마다 10문, 관보와 서적류는 8돈쭝
마다 10문이었다. 한성(서울) 안에서 주고받는 우편물은 그 요금을 반액으로 할인해 주었기에 실제로
필요한 우표는 5문과 10문이었다. 아무튼 나중에 도착한 25문과 50문, 100문 등 세 종의 우표는 포장을
풀지도 않은 채 창고에 보관해 두어야만 했다. 결국 한 장도 사용하지 못한 채 폐기처분 될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문위우표의 발행 수량은 액면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사용량이 가장 많을 것으로 예상된 10문
우표는 100만 매, 사용량이 가장 적을 것으로 예상된 100문 우표는 30만 매였고, 나머지 세 종의 우표는
각각 50만 매였다. 그 많은 우표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
1884년 10월 1일 우정총국이 문을 열었다 20일 만에 문을 닫을 때까지 서울 우정총국과 인천분국에서
몇 매의 우표를 판매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았다. 따라서 실제로 판매된 우표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 해서 그 수량이 어느 정도인지 유추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갑신정변으로 우편사업이 중단되고 나서 우편사업을 다시 시작한 것은 11년 뒤인 1895년 6월 1일이었다.
당시의 관보에 나타난 통계에 의하면, 그 해 6월 1일부터 15일까지 보름 동안에 한성우체사에서 취급한
우편물은 접수가 137건, 배달이 147건이었다. 당시에는 우체국이 서울과 인천 두 군데밖에 없었으므로
두 지역의 우편물을 합친다 해도 300건이 채 안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우정총국 시절인 1884년에 20일
동안 취급한 우편물은 많아야 300여 통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5문과 10문 우표의
잔여분도 우정총국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을 것이다.
서울중앙우체국은 6ㆍ25전쟁 때 폭격을 받아 새까맣게 불탔다. 그 자리에 3층짜리 청사를 신축했다.
1957년 1월 새 청사 낙성식이 있는 날, 대통령 이승만이 참석해 축사를 했다. 그 자리에서 그는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를 했다.
“갑신란 때 폭도들이 우정국을 습격해 기물을 마구 부수고 우표를 모조리 길바닥에 흩뜨려 버렸는데,
그걸 주워 방벽에 발랐어요. 그걸 외국인들이 보고 수십만 달러에 사갔어요.”
문위우표는 여느 우표보다 크고 무늬도 고와 도배종이로 사용하기에 안성맞춤이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70년도 더 지난 일을 그처럼 생생히 기억한 것을 보면 이승만이 우표수집가였기에 가능했으리라.
일부 우표는 그렇게 사라졌을 것이다. 설사 폭도들이 일부를 가져갔다 하더라도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불쏘시개로 재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5문과 10문 우표의 일부에
불과했다.
다행히도 나머지 우표의 행방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 있다. ‘외아문일기’는 아무 쓸모가 없게 된 고액권
세 종 130만 매는 1886년 1월 전량 독일인 무역회사 세창양행에 불하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외아문’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통칭인데, 외아문일기는 1883년 8월 1일부터 1895년 5월 2일까지의 일을
일기식으로 기록한 글이어서 믿을 만했다. 아무튼 세창양행에 불하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을 뿐 판매
가격에 대해서는 말이 없었다.
그 많은 우표를 사들인 세창양행은 어떤 회사이며, 그 많은 우표는 어떻게 되었을까?
세창양향(世昌洋行)은 독일인 마이어(Meyer)가 제물포(인천)에 세운 무역회사였다. 함부르크 출신인
마이어는 18세 때 중국으로 건너와 홍콩에서 무역업을 시작해 톈진에서 마이어무역회사를 세웠다.
사세가 확장됨에 따라 중국은 물론 일본 고베, 조선 제물포 등지에도 지사를 설립했는데, 제물포에
설립한 회사가 바로 세창양행이었다.
세창양행은 당시 우리 정부의 고문으로 활약한 독일인 묄렌도르프의 후원을 받으며 무역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는데, 홍삼과 금, 토산품 등 여러 가지 상품을 수출하고 면직물과 바늘, 시계, 자전거, 금계랍 등
당시로서는 귀한 외국 상품을 수입해 팔았다. 강원도 당현에서 금광을 개발하기도 했다. 조선이 개항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어서 일본 상인들의 활동이 미약한 틈을 타 거의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며 무역
활동을 했고, 조선 정부에 10만 냥의 재정 차관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 대가로 인천ㆍ상하이 간의 정기
항로와 홍삼의 독점 수출을 노렸으나, 청국 상인의 방해로 실패했다.
1886년 마이어는 함부르크 주재 조선총영사로 임명되었다. 함부르크에 거주하는 조선인이 없을 때여서
명예직에 불과했으나, 그는 그 자리를 이용해 독일로 수입하는 조선 상품에 대해 면세 혜택을 누리며
무역 활동을 계속했다. 특히 골동품으로서의 가치가 있는 우리나라 상품을 수입해 1889년 함부르크에서
개최된 산업박람회에 출품하기도 하고, 함부르크미술공예박물관에서 조선물품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만큼 우리나라 상품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고 할 수 있었다.
세창양행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신문에 광고를 낸 회사여서 당시에는 그 이름이 꽤 알려져 있었다.
1886년 2월 22일자 한성주보에 ‘덕상 세창양행 고백(德商 世昌洋行 告白)’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순
한문으로 된 최초의 광고 내용이 꽤나 흥미로웠다.
“알릴 것은 이번 저희 세창양행이 조선에서 개업해 호랑이, 수달피, 검은 담비, 흰 담비, 소, 말, 여우, 개
등 각종 가죽과 사람의 머리털, 소ㆍ말ㆍ돼지의 갈기털ㆍ꼬리ㆍ뿔ㆍ발톱, 조개와 소라, 담배, 종이,
오배자, 옛 동전 등 여러 가지 물건을 사들이고 있습니다. 손님과 상인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물건은 그
수량의 다소를 막론하고 모두 사들이고 있으니, 이러한 물건을 가지고 저희 세창양행에 와서 공평하게
교역하시기 바랍니다.”
인천에 있었던 세창양행 사택
구입 광고와 아울러 판매 광고도 냈다.
“알릴 것은 이번 덕상(德商) 세창양행이 조선에서 개업해 외국에서 자명종, 요지경, 뮤직 박스, 유리,
각종 램프, 서양 단추, 각종 직물, 서양 천을 비롯해 염색한 옷, 선명한 안료, 서양 바늘, 서양 실, 성냥 등
여러 가지를 수입해 물품의 구색을 맞추어 공정한 가격으로 팔고 있으니, 모든 손님과 상인은 찾아와
주시기 바랍니다. 소매상이든 도매상이든 시세에 따라 교역할 것입니다. 아이나 노인이 오더라도 속이지
않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저희 세창양행의 상표를 확인하시면 거의 잘못이 없을 것입니다.
‘덕상’이란 독일 상인을 가리키는 말이며, 광고라는 용어가 없던 시절이라 ‘고백’이라는 낱말을 썼던 점
또한 흥미로웠다. 당시 중국이나 일본에서 ‘광고’ 대신 쓰던 말이라 한다. 당시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재미있는 광고라 하겠다.
위의 구입 광고에서 옛 동전은 찾되 우표는 찾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 광고를 내기 한 달쯤 전,
세창양행은 조선 정부가 가지고 있던 문위우표를 전량 싹쓸이했던 것이다.
우정총국이 문을 닫고 나서 수개월이 지난 1885년 3월, 주한 일본공사관은 조선 정부의 외교통상 업무를
맡고 있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 크고 작은 두 궤짝의 우표를 보내며 대금을 지불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미 우정총국이 폐지되었고 우편사업을 재개할 계획이 없었던지라, 조선 정부는 대금 지급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국가 재정이 빈약할 때여서 770여 원이나 되는 우표 대금을 마련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때 조선 정부에서 총세무사 벼슬을 맡고 있는 미국인 메릴(Merrill)이 해결사로 나섰다. 그는 쓸모없게
된 우표를 인천에 있는 독일인 무역회사 세창양행에 팔아넘기기로 하고 거간꾼 노릇을 했다. 그 결과,
이듬해 1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과 세창양행 사이에 우표 불하계약이 성립되었다. 불하 대금이 얼마
인지 알려지지 않았으나 휴지나 다름없는 우표가 비싸게 팔렸을 리 없었다. 조선 정부는 그 판매 대금에
모자라는 금액을 채워 일본으로 송금했다. 문위우표의 인쇄비 문제는 그렇게 해결되었다. 덕분에 세창
양행은 25문ㆍ50문ㆍ100문의 고액권 우표 130만 매를 손에 넣게 되었다.
뒷날 한국우표 수집가들이 그 덕을 톡톡히 보았다. 비록 사용하지 않은 우표이긴 하지만 100년이 지난
문위우표 5종을 10만원 안팎에 살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마이어 덕분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가 보관
하고 있던 문위우표를 조금씩 풀어놓았던 것이다. 아무튼 세트로 흘러나오는 문위우표 다섯 종 중에서
5문과 10문 우표의 값이 제일 비쌌다. 그들 두 종 우표의 잔량이 적었기에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었다.
고액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싸긴 하지만 두 종 우표가 세트로 나돌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5문과 10문
우표의 잔량도 세창양행에서 구입했을 것이라는 추정은 쉽게 할 수 있었다.
그처럼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문위우표는 구할 수 있었으나, 실제로 편지봉투에 붙여져 배달된 적이
있는 문위우표 사용제는 구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실제로 사용된 문위우표는 전 세계를
통틀어 20가 채 안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위우표가 사용된 기간이 20일밖에 안 된 데다 외국인을
제외하고는 우표의 가치에 눈을 뜬 사람이 없던 시절인지라, 오히려 남아 있다는 게 신기하다 하겠다.
우표는 우편요금을 납부한다는 증표로 사용되었다. 때문에 우표는 우편물을 보내는 당사자가 편지에
붙여 우체국 창구에서 접수시키고, 우체국 직원이 편지에 붙은 우표에 도장을 찍고, 소인된 우편물이
기차나 배, 비행기 등을 타고 수취인이 사는 고장으로 옮겨져 수취인에게 전달될 때 그 사명을 다하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편지에 붙여지지 않은 우표는 생명력을 잃은 인쇄물에 불과하다 하겠다. 예외가
있었다. 우표는 우편요금을 납부했다는 증표 외에 수집품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사용한 우표든
사용하지 않은 우표든, 우표를 수집해 보관하는 수집가가 늘어나면서 우표는 소장품으로서의 또 다른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이미 불용품으로 폐기처분되어 폐지나 다름없는 문위우표가 독일까지 날아가
오랜 세월 숨죽이고 있다 100년이 지나 되살아난 이유였다.
세창양행의 주인 마이어가 진짜 우표수집가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수준급의 우표수집가
였거나 수집품으로서의 우표의 가치에 눈뜬 사람임은 분명했다. 우리나라 두 번째 우표인 태극우표가
발행되자 그는 태극우표 4종이 붙은 봉피를 만들어 친지나 우표수집가에게 뿌렸다. 그들 봉피는 뒷날
한국우표 수집가들에게 매우 요긴한 자료로 활용되었다.
마이어의 후손은 그의 고향 함부르크에 살고 있었다. 후손의 집에는 고종으로부터 하사받은 병풍이며
조선에서 찍은 사진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가 수집한 한국 민속품은 함부르크민속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그가 함부르크 주재 조선총영사였고, 세 차례에 걸쳐 함부르크민속박물관에 기증한 유물이 949점이 된
사실로 볼 때 조선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일화로 보는 우편 130년 이전글 다음글 보기
이전글 예향에서 뿌리 내리고 있는 전남청의 편지쓰기운동
다음글 홍영식의 집이 광혜원으로 바뀐 사연

기 발행된 모든 우표류(우표, 엽서, 원화, 우표책, 우표첩, 날짜도장)의 이미지 및 내용을 사용할 수 있으나, 이미지와 내용을 변경하여 사용시에는 우정사업본부의 승인을 받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