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처음 개최된 필라코리아 84라는 이름의 세계우표전시회는 1984년 10월 22일부터 31일까지 10일 동안 계속되었다. 전 세계 130개국에서 출품한 작품 3122개 틀과 우취문헌 105점이 전시되었는데, 우리나라와 수교가 없는 나라가 15개국이나 참가했다. 외국인을 포함한 관람객 수는 16만 1000여명이었다. 45개나 되는 우표 판매 부스에서 세계 각국의 우표상들이 진귀한 우표를 판매했다.
필라코리아 84는 그처럼 많은 나라의 우취문화 상품이 참가했다는 점에서, 10일에 걸쳐 수많은 국내외 관람객들이 운집했다는 점에서, 또한 국내에서 처음 개최된 국제문화행사를 한 치의 차질 없이 질서있게 치렀다는 점에서 매우 성공적인 행사라 할 수 있다. 당시의 한국은 경제가 발전하기 시작하는 개발도상국에 불과했음에도 처음 개최한 국제행사를 멋지게 치름으로써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고 있는 한국인의 저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것이다.
필라코리아 84 국제우표전시회 행사의 주역은 우정국 우표과장 윤범식이었다. 그가 1년 반 남짓한 기간에 행사를 기획하고 추진했으며 실제로 행사를 개최하고 뒷마무리까지 했으니 필라코리아 84는 그의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만큼 그는 그 행사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열정과 땀을 쏟았다.
김천우체국장 윤범식이 우정국 우표과장으로 발탁된 것은 1983년 1월이었다. 그때까지 그는 1984년에 세계우표전시회가 개최된다는 사실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에게 그 사실을 알려 준 사람은 우표과 우취보급계 주사 하종윤이었다. 하종윤은 이듬해 필라코리아 84가 열리게 되어 있음을 보고하며 그때부터 서둘러도 결코 빠르지 않음을 일깨워 주었다. 우취보급계장 이교용은 차관 비서관을 겸하고 있어 소관 업무에 대해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그 말을 듣자 덜컥 겁이 났다. 우표 분야에서 전 세계 대표 선수들을 모아놓고 올림픽경기를 치러야 한다는 말인데, 세계우표전시회는 어떤 절차를 밟아 어떻게 준비하고 치러야 하는 것이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침 하종윤이 1981년 대만에서 개최된 국제우표전시회 필름을 보관하고 있다며 틀어 주었다. 몇 차례 반복하여 구경했는데, 국내우표전시회를 개최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전문가의 조언을 듣고 싶어도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세계우표전시회를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 것인지, 외국의 예를 아는 사람은 한국우취단체총연합회 섭외위원장 강윤홍 씨밖에 없었어요. 그분에게 물어가며 준비 작업에 착수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만큼 당시는 우리나라 우취계가 빈약했어요."
올림픽대회를 준비하려면 올림픽 조직위원회를 구성해야 하듯 세계우표전시회를 개최하려면 별도의 준비 기구를 설치해야만 했다. 이에 대비하여 FIP 헌장은 주최국에 조직위원회와 집행위원회를 설치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필라코리아 84 역시 행사의 준비 기구로 조직위원회와 집행위원회를 설치하고, 조직위원장에 한국우취연합 회장 구자경을 선출하고, 집행위원장에 우정국장 신윤식, 사무총장에 우표과장 윤범식을 임명했다. 그처럼 세계우표전시회는 정부와 민간단체인 한국우취연합이 공동으로 개최하는 형식을 취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정부가 도맡아 추진해야만 했다.
조직위원회를 구성하기에 앞서 체신부는 우취단체연합회를 재구성했다. 국내 우취인들은 국제우취연맹(FIP) 가입과 세계우표전시회 개최에 대비하여 1974년 3월 우취단체의 연합체인 한국우취단체총연합회를 결성한 바 있다. 발족 이후 연합회는 명칭만 유지하고 있을 뿐 실질적인 활동은 하지 않았다. 1983년 8월 체신부는 한국우취단체총연합회를 개편하여 사단법인 한국우취연합을 발족시키고, 회장에 구자경, 부회장에 이규봉과 강윤홍을 앉혔다. 그리고 서울중앙우체국에 사무실을 마련해 주고, 필라코리아 84 세계우표전시회의 개최 준비 작업에 적극 참여하도록 했다.
세계우표전시회는 준비 작업으로부터 개최에 이르기까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수십 가지의 홍보 책자와 수천 장의 문서들을 작성하고 번역하여 세계 각국으로 보내고, 출품작을 접수하여 전시 틀을 배정하고, 각 나라의 대표 수집위원을 선정하고, 심사위원을 선정하여 FIP의 승인을 받고, 각 나라 우표상에게 판매 부스를 임대해 주고, 초청 작품을 교섭하는 등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었다. 출품작을 통관하여 안전하게 운반하는 것도 집행위원회의 임무였다. FIP 회장 등 초청 인사들을 공황에서 영접하여 숙소까지 안내하는 것도 그들의 몫이었다. 공산국가인 체코 출신의 FIP 회장 드보라체크를 초청하기 위해서는 안전기획부와 사전 협의를 거쳐야만 했다. 초청된 인사들에게는 서울시내는 물론 지방 관광까지 시켜야 했다. 심지어 초청자 부인들을 관광시키는 행사를 별도로 마련했다.
행사 주관의 총책임자인 사무총장의 입장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는 소요 예산과 인원의 확보였다. 필라코리아 84는 체신부와 민간기관인 한국우취연합이 공동으로 개최했으나, 기금이 한 푼도 없는 한국우취연합은 빈털터리에 불과했기에 모든 자금은 체신부가 부담해야만 했다. 그리고 체신부 예산으로 집행하려면 미리 이듬해 예산에 반영시켜야만 했다.
"필라코리아 84와 같은 국제 행사를 거행하려면 상당한 예산과 인원이 필요한데, 우선 급한 게 예산 편성이었어요. 익년도 예산을 1983년 5월 말까지 경제기획원에 제출해야 하니까 시간이 너무 촉박했어요. 게다가 세계전을 치르는데 어떤 항목에 어느 정도의 비용이 소요되는지 알 수가 있어야죠. 필요한 항목을 모두 파악해 정확한 비용을 산출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어요."
필라코리아 84 사무총장으로 활약했던 우표과장 윤범식의 말이었다.
그처럼 어려움 투성이인 준비 과정에서 개최 장소만큼은 생각보다 쉽게 결정할 수 있었다. 필라코리아 84와 같이 넓은 장소를 필요로 하는 전시장은 코엑스밖에 없어 다른 장소를 물색할 필요가 없었다. 코엑스의 경우 수요가 넘쳐 2년 전에 미리 예약해야만 했다.
그처럼 행사를 준비하는 것 자체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보다 중요한 과제는 따로 있었다. 세계우표전시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는 수준 높은 작품을 출품시켜야 한다. 수준 높은 작품이 전시될 때 전시회의 품격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최초로 발행된 우표인 '페니 블랙(Penny Black)'을 초청 작품으로 출품시킨 것도 관람객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그처럼 수준 높은 작품을 유치하기 위해서는 세계적으로 이름 있는 우표수집가들의 작품 참가가 필수적이었다.
세계우표전시회를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명망 있는 심사위원의 참여였다. 심사위원이 하는 일은 출품작을 심사하여 등급을 매기는 것이었다. 그들이 출품작을 제대로 평가하여 공정하게 점수를 매길 때 전시회의 품격이 높아진다. 그러나 전 세계에서 출품하는 작품을 대금상에서 장려상에 이르기까지 9단계로 나누어 점수를 매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취인의 분포도로 볼 때 한국은 우취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유럽과 멀리 떨어져 있어 변방 국가에 불과했다. 세계우표전시회에서 입상한 경험이 있는 우표수집가는 거의 없었고, 따라서 외국의 저명 우취인과 교유하고 있는 사람도 없다시피 했다. 그런 상황에서 세계우표전시회를 개최하게 되었으니 수준 높은 작품을 유치하는 것도, 유능한 심사위원을 모셔 오는 것도 바라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처럼 불모지나 다름없는 한국 우취계에 각국에서 개최되는 세계우표전시회에 출품자 내지 커미셔너(Commissioner)로 열심히 참여하며 해외 저명 우취인들과 교유하고 있는 인사가 한 명 있었다.
강윤홍은 우리나라 우취계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한국이 FIP에 가입한 것은 오로지 그의 공이라 할 수 있다. 한국우취단체총연합회 섭외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던 그는 1975년 4월 스페인 마드리드로 날아가 세계우표전시회에 출품하는 한편 그곳에서 열리는 FIP 총회에 참석하여 북한의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한국 가입을 성사시켰다. 다시 1982년 6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FIP 총회에 참석하여 북한의 맹렬한 반대을 꺾고 한국이 우정 100년을 맞아 개최하게 되는 세계우표전시회에 FIP의 공식 후원을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덕분에 한국은 1984년 우정 100주년을 맞아 필라코리아 84 세계우표전시회를 개최할 수 있었다. 그처럼 중요한 행사에 그는 자비를 들여 가며 참석해 쾌거를 이룩했던 것이다.
그의 공로는 FIP 가입과 필라코리아 84의 개최로 끝나지 않았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개최되는 세계우표전시회를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 그는 남몰래 노력했다. 우표전시회를 성공으로 이끄는 길은 우수한 작품의 유치와 명망 있는 심사위원의 참여라 판단했기에 그는 각국에서 열리는 세계우표전시회를 찾아다니며 영양가 있는 우취인들과 교유했다. 1975년 스페인을 방문한 이후 체코, 오스트리아, 프랑스, 브라질 등지에서 열리는 세계우표전시회를 찾아다니며 한국에서 개최될 필라코리아 84에 대해 설명하며 작품의 출품은 물론 심사위원으로 참여해 달라고 부탁했다. 일본이나 대만, 태국 등 아시아 지역에서 개최하는 세계우표전시회도 빼놓지 않았다. 그처럼 자비를 들인 외교로 각국 우취인들과의 교유의 폭을 넓혀 나갔다.
"제가 그 동안 세계전을 열심히 찾아다녔던 것은 필라코리아 84의 성공을 위해서였어요. 이름 있는 우취인들의 작품이 출품되어야 그 전시회의 성가가 높아지거든요. 한국은 우취 후진국인 데다 우취문화가 발달한 유럽 국가들의 입장에서 볼 때 변방에 치우쳐 있어 이름 있는 우취인들이 참가하려 하지 않았어요. 그러한 사람들의 관심을 환기시키려면 직접 만나 설득하는 길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유럽과 남미 등지에서 개최된 세계전을 참관하며 유명 우취인들을 일일이 만나 1984년 한국 우정 100주년을 맞아 개최되는 필라코리아 84에 참석해 달라고 부탁하곤 했어요. 어떤 분들에겐 심사위원으로 참여해 달라고 했고요. 영국, 미국, 독일 등 우취 선진국 사람들은 어떤 전시회나 반드시 출품하기 때문에 굳이 부탁하러 다닐 필요가 없었죠."
한국우취단체총연합회 섭외위원장 강윤홍의 말이었다.
그처럼 우취인 강윤홍은 필라코리아 84가 개최되기까지 10년 동안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필라코리아 84를 성공적으로 개최할 수 있도록 정지작업을 했다. 덕분에 한국에서 처음 개최된 세계우표전시회에는 수준 높은 작품들이 출품될 수 있었다. 유럽과 북미는 물론 남미까지 자랑할 만한 작품이 많이 출품되었다. 한 우취인의 헌신적인 노력이 우리나라에서 처음 개최되는 세계우표전시회를 빛나게 했던 것이다.
주최측의 치밀한 계획과 빈틈없는 진행, 우취인들의 협조에 힘입어 필라코리아 84 세계우표전시회는 예정대로 10일 간의 전시를 마치고 종료되었다. 우취문화의 변방국이라 할 수 있는 한국에서 개최된 우표전시회 치고는 참가국도 많고 관람객도 많았다. 우표를 판매하기 위해 설치한 외국인 부스에서는 2억 원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입에 발린 말일 수도 있으나, 전시회에 참여했던 심사위원, 커미셔너, 외국인 관광객 등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세계 제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이 세계 제일이라며 구체적으로 든 예가 갖가지였다. 첫째는 전시장이 1개 층에 넓게 자리잡고 있어 관람하기 편했다는 점을 꼽았다. 시설물이나 틀 배열이 짜임새 있게 꾸며져 있다는 점도 점수를 얻었다. 우수한 작품이 많이 참가했으며 우표 판매 부스도 알맞게 설치되었다는 점도 높은 점수를 땄다. 관람객이 예상외로 많고 작품을 구경하는 사람이 많다는 반응도 있었다. 후진국의 경우 작품을 구경하기보다 우표 판매 부스를 찾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라 했다. 그밖에 집행부 직원들이 한결같이 친절하다거나 안내사항에 신속히 대응해 주었다는 칭찬도 있었다. 외환 송금을 신속히 처리해 주어 고맙다는 사람도 있었다.
행사 개최를 앞두고 주최 측에서 각별히 신경쓰지 않을 수 없는 사항은 FIP 회장 드보라체크의 초청이었다. 드보라체크는 체코의 외무부차관을 지낸 외교관 출신인 데다 10년 가까운 세월 FIP 회장을 지낸, 명망 있는 우취인이어서 초청하지 않을 수 없으나, 공산권 출신이라는 점이 문제점으로 대두되었다. 당시는 우리나라가 공산권 국가와는 수교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안기부와 사전에 협의한 끝에 초청하기로 하고, FIP로 공문을 보내 참석 여부에 관한 의사를 타진했다. FIP의 일정상 참석하기 어렵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조직위원회 사무총장의 명의로 재차 공문을 보냈다.
"'우취문화가 발달하지 못한 한국에서 어렵게 세계우표전시회를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FIP 회장이 참석하지 않는다면 영광스러운 개최국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한국은 남북이 분단되어 있는 나라인데, 우리는 우취를 통해 전 세계의 평화를 추구하고자 한다. 이처럼 중요한 대회에 귀하가 참석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준다면 더없는 영광이 될 것이다.' 그처럼 가급적 애절한 내용으로 편지를 써서 보냈어요. 그리고 1등석 항공권을 끊어 보냈죠."
조직위원회 사무총장 윤범식의 회고였다.
윤범식의 편지에 감동했던지 드보라체크는 한국으로 날아왔다. 대회 기간 중 그는 서울의 뒷골목까지 섭렵하며 한국에 대해 알고 싶어했다. 그리고 체코에 유학중인 북한 학생의 부탁이라며 한국 경제 관련 책자 10여권을 사 달라고 했다. 책의 제목과 저자 이름을 한글로 적어 왔으므로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한국을 떠나기 직전 그가 김포국제공항 귀빈실에서 필라코리아 84에 관한 소감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 동안 저는 토후국을 포함해 200여 개국을 다녔고 국제우표전시회에도 120회 참석했는데, 이번에 개최한 필라코리아 84가 가장 훌륭한 전시회였다고 생각합니다. 의례적인 말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가장 잘 치러진 전시회였습니다. 필라코리아 84의 준비와 진행은 매우 조직적이고 완벽했습니다. 참가자들의 공항 영접으로부터 차량 배치, 전시장의 설치, 시내 및 지방 관광 등 모든 면에서 빈틈이 없었습니다. 지난 9월 호주에서 개최된 전시회 때는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일정이 없어 무료하게 보냈는데, 한국에서는 시간 계획이 철저하게 짜여 있어 잠시도 숨 돌릴 틈을 주지 않았습니다. 한국인이 매우 우수한 민족임을 새삼 느끼고 돌아갑니다. 필라코리아 84는 대성공일 뿐만 아니라 이번 행사를 통해 한국은 정치ㆍ외교적으로도 크나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생각합니다."
필라코리아 84 세계우표전시회는 그 같은 찬사를 받으며 막을 내렸다. 덕분에 한국 우취계는 후진국에서 선진국 수준으로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