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서울시청과 비슷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직할의 서울연통부(聯通府)가 자리잡고 있던 터이다.
1919년 3ㆍ1운동 직후인 4월 13일 중국 상해에 수립 선포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한 정책의 하나로 연통부와 교통국(交通局)을 은밀히 조직하여 국내외를 오가며 활약하였다. 그 중 서울연통부는 일제와 싸우면서 임정(臨政)이 수립되어 활동하고 있음을 국민에게 알리고 나라 안의 각종 정보와 군자금을 임정에 보고 전달하였다. 그러나 1922년경 서울연통부의 활동은 일제에 의해 저지됨으로써 주춤해졌다.
이곳은 원래 조선조 숙종대왕비 인현왕후가 탄생한 곳으로 1897년에 설립된 민족기업인 동화약방이 들어섰다가 1962년에는 동화약품공업주식회사로 상호가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서울연통부의 행정 책임자는 동화약방 설립자의 아들인 민강이었는데, 독립운동 중 그가 일경(日警)에 체포되면서 연통부의 기능이 약화되었다.”
이상은 서울 중구 서소문로9길 87번지에 자리하고 있는 동화약품(주)의 옛터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서울연통부 지(址)’라는 제목으로 세워진 기념비의 전문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제약회사인 동화약품은 그 전신인 동화약방 시절 한때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내 연락망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던 바, 그 공을 기리기 위해 1995년 8월 15일 서울특별시가 기념비를 세웠던 것이다.
그렇다면 임시정부 연통부와 교통국은 어떤 역할을 한 기관이었으며, 동화약방과는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1910년 한일합병으로 나라를 잃은 우리 백성이 임시정부를 세워 나라를 되찾으려는 운동을 전개한 것은 3ㆍ1운동 직후였다. 3ㆍ1운동이 확산되면서 국내외에 있던 애국지사들 사이에 독립운동을 확대하기 위해 임시정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일제의 감시와 통제가 철통같은 상황이어서 상호간의 연락이 원활하지 못했음에도 7개나 되는 임시정부가 국내외에 수립되었다. 그 가운데 조선민국임시정부와 고려공화국, 간도임시정부, 신한민국정부 등은 그 실체가 확인되지 않았는데, 수립 과정과 주체가 명확한 단체로 상하이임시정부와 한성임시정부, 노령(露領)임시정부 등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비교적 활동이 활발한 단체가 상하이임시정부였다. 중국 상하이(上海)는 교통이 편리한 데다 쑨원(孫文)이 이끄는 중화혁명당의 지원을 받을 수 있어 이동녕, 여운형, 조소앙 등 많은 독립운동가가 모여 있었다. 그들은 신한청년단을 결성하고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할 채비를 하던 중 한성임시정부의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자극받은 상하이 독립운동가들은 1919년 4월 10일 13도 대표로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을 구성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했다. 그리하여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임시정부의 행정수반인 국무총리에 이승만을 추대했다.
이에 따라 1919년 9월 6일 한성임시정부와 노령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통합되었다. 노령임시정부와 상하이임시정부는 각기 정부를 자기 지역에 두고자 했으나, 결국 교통이 편리하고 외교활동을 전개하기에 편리한 상하이에 두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단일화된 상하이임시정부는 대통령에 이승만, 국무총리에 이동휘를 선출하고 그 산하에 내무, 외무, 군무, 재무, 법무, 학무, 교통 등 7개 부를 두었다. 통신 업무를 담당하는 체신부는 설치하지 않았다.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있는 프랑스조계 내에 설치되어 있어 남의 나라에서 독자적인 체신행정을 펼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미국이나 연해주, 만주 등지에 있는 동포와의 연락은 다른 나라의 통신기관을 이용했고, 국내에 있는 동포와의 연락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비밀 연락망을 형성하기로 했다.
그때 상하이임시정부가 국내에 있는 독립운동가들과 연락하기 위해 비밀리에 만든 통신 조직이 내무총장 산하의 연통부(聯通府)와 교통총장 산하의 교통국(交通局)이었다. 비록 상하이임시정부에 체신부라는 통신기관은 없었으나, 연통부와 교통국이 있어 짧은 기간이나마 임시정부의 통신 조직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연통제는 임시정부가 수립된 직후인 1919년 7월 10일 국무원령 제1호로 공포되었다. 연통제의 국내 조직을 살펴보면 서울에는 총판(總辦), 부에는 부장(府長), 군에는 군감(郡監), 면에는 면감(面監)을 두어 임시정부와 국내 각 지방과의 연락을 맡고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연통제는 처음에는 국내에서만 실시했는데, 1920년에는 그 실시 지역을 만주로 넓혀 만주지역의 동포와 임시정부와의 연락망 구실도 했다.
일제의 감시가 극심했기에 임시정부 통신망으로서의 연통제는 전국에 고르게 형성되지 못했다.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등 한반도 서북지방에서는 전 지역에 걸쳐 비교적 순조롭게 조직되었으나, 경기도와 충청도는 일부 지역밖에 조직되지 못했고 강원도와 경상도, 전라도의 경우 거의 조직되지 못했다. 연통제가 형성되지 못한 지역은 그와 유사한 독립운동조직이 만들어져 그 임무를 대신했다. 강원도 전역과 충청도 및 전라도의 일부 지역에는 대한독립애국단이 조직되어 임시정부와의 연락을 맡았고, 경기도 일부와 경상도, 충청도 및 전라도에서는 청년외교단, 대한민국애국부인회, 대한적십자회 등이 그 임무를 대신하기도 했다.
연통제는 임시정부의 통신망으로서 임시정부의 활동상을 국내에 알리고 조선총독부의 움직임을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한편 독립운동자금을 수집 전달함으로써 임시정부의 활동을 도왔다. 그러다 보니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많은 조직원이 희생되었다. 1919년 9월 평안남도에서 연통제와 관련된 서류가 일본 경찰에 발각된 데 이어, 그 해 11월에는 함경도 나남에서 독판부원과 군감 전원이 체포되면서 국내조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연통제에 관련한 인원이 전국적으로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으나, 1920년 8월 함흥지방에서 연통제 요원으로 체포되어 재판받은 사람이 40여명이나 되었다. 그 후 연통제 요원은 각 지방에서 계속 발각되어 1921년에는 전국의 조직이 붕괴되다시피 했다.
연통부와 유사한 조직으로 교통국이 있었다. 상하이에 있는 임시정부가 제 기능을 발휘하려면 국내에 있는 동조 세력과의 연대가 원활하게 이루어져야만 했다. 국내에 있는 동포들의 지원이 없으면 임시정부의 활동은 한 발짝도 진전될 수 없었다. 때문에 임시정부는 국내에 특파원을 파견하여 국내 세력과의 연대를 시도했다.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형성한 조직의 하나가 임시정부 내무부 산하의 연통부(聯通府)였고, 또 하나는 교통부 산하의 교통국(交通局)이었다. 교통국은 국내는 물론 만주와 연해주에 거주하는 동포들과 통신 연락을 하고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임시정부가 만든 일종의 비밀 연락조직망이었다. 1919년 5월 임시정부는 의정원(議政院) 회의를 거쳐 다섯 가지 시정방침을 발표했는데, 여기에 교통부 산하의 연락망 조직이 포함되어 있었다.
임시정부 교통부는 국내와 연락하기 용이한 만주 안둥(安東)에 지부를 설치하고 국내와의 연락망 조직에 착수했다. 지부가 설치된 곳은 안둥 시내에 있는 이륭양행(怡隆洋行) 2층이었다. 이륭양행은 아일랜드인 조지 쇼(G. L. Shaw)가 경영하던 무역회사 겸 선박대리점이었다. 무역상인 쇼는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 도와 독립운동가들을 숨겨 주는 한편 그들에게 상하이와 안둥 사이를 왕래하는 선편을 제공했고, 임시정부는 이를 이용해 국내와의 연락은 물론 군자금 모집과 무기 운반 등의 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 쇼는 그의 고국 아일랜드가 영국의 식민지하에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처지를 잘 이해하고 적극 도왔던 것이다.
교통국의 조직으로 국내에는 각 군에 교통국, 각 면에 교통소(交通所)를 설치했다. 이를 총괄하는 교통부 안둥지부에는 사무국장 1명에 금전모집과, 통신과, 인물소개과를 두었는데, 군 단위로 조직되는 교통국의 조직도 이와 같았다. 또한 면 단위에 설치되는 교통소는 소장 1명과 금전모집계, 통신계, 인물소개계로 구성되어 있어 안둥의 교통지부와 군 단위의 교통국, 면 단위의 교통소가 모두 그 같은 조직을 운영하기 위한 요원 확보 등을 주된 목적으로 했다. 교통국은 임시정부의 활동자금을 모집하고, 독립운동과 관련된 각종 정보를 수집하고, 임시정부의 지령을 전달하고, 독립운동을 위한 활동요원을 확보하고, 각종 문서를 전달하고, 무기를 조달하는 등 여러 가지 임무를 맡았는데, 그 같은 업무를 맡은 통신원 등 활동요원은 통신 수단으로 각종 암호를 사용했다.
안둥교통지부는 애초에는 국내와의 통신 연락을 위하여 설치했는데, 얼마 후에는 만주지역의 통신 연락도 관장하게 되었다. 만주지역의 조직은 교통국 대신 통신국이라 불렸다.
교통국의 활동은 비밀리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 전모를 알기 어려웠다. 일본 경찰에 의하여 밝혀진 자료를 추적함으로써 대강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안둥교통사무국 관할하에서는 의주교통지국과 삭주, 창성, 벽동, 초산, 위원, 강계, 자성, 후창 등 이른바 강변8군 교통국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다. 강변8군은 중국과 국경을 이루고 있는 지역이어서 어느 교통국보다 많은 업적을 남겼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안둥영사관은 1920년 7월 안둥교통사무국 연와(燕窩)출장소를 습격해 오학수 등 수 명을 체포하고 교통국 활동을 돕던 아일랜드인 쇼도 체포했다. 오학수 등은 3년 금고형을 받았는데, 쇼는 4개월 뒤 석방되었다. 그보다 앞서 그 해 5월 경상도에 교통국을 설치할 목적으로 파견된 김영규가 체포되었다. 그 사실을 통해 경상도 지방에도 교통국을 설치하려는 노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나, 실제로 어느 규모의 조직이 형성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서울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연통부를 설치하려던 계획은 상하이에서 파견한 특파원 이종욱이 1919년 10월 송세호, 나창헌, 신현구, 전필순, 윤종석 등 애국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젊은 단원들과 수차 회합을 가지면서 구체화되었다. 그들은 상하이임시정부와 국내 애국단체가 서로 연락을 취하고 중앙과 지방간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서울에 연통부를 설치하기로 하고, 연락을 주고받을 장소를 물색했다. 그때 그들에게 연락 장소를 제공한 사람이 다름아닌 동화약방 주인 민강이었다. 그는 서소문로에 있는 그의 약방을 연통부의 연락 거점으로 삼도록 내놓았다. 상하이임시정부의 비밀 행정조직인 서울연통부는 그렇게 서울 서소문로에 세워지게 되었다.
민강은 오래 전부터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한일합병 직전인 1909년에는 독립운동단체인 대동청년단을 조직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한 바 있고, 한일합병 직후에는 소의학교와 조선약학교를 세워 2세 교육에도 힘썼다. 1919년 3ㆍ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한성임시정부 설립에 앞장서기도 했다.
동화약방의 대표적인 상품은 활명수였다. 한때 만병통치약이라 불리기도 했던 활명수는 불티나듯 팔렸다. 전국에는 동화약방 지점이 설립되었고 특약점이 만주지방까지 퍼졌다. 당시 활명수 1병의 값이 50전이었다고 한다. 설렁탕 두 그릇에 막걸리 한 말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때문에 독립운동가들은 돈 대신 활명수를 짊어지고 중국으로 건너가 비싼 값으로 팔아 독립운동자금으로 썼다고 한다. 동화약방은 활명수로 벌어들인 돈을 임시정부의 활동자금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그 무렵 동화약방 사장 민강은 한성임시정부 수립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비밀결사조직인 대동단에 가입했다. 대동단은 의친왕 이강을 상하이로 탈출시켜 임시정부와 합류시키려는 계획을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었는데, 그 계획이 실패로 끝나면서 대부분의 단원들이 체포되었다. 민강도 체포되어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이후에도 몇 차례 옥고를 치르다 1931년 병사했다. 그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민강이 체포되면서 동화약방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동화약방이 파산 직전의 곤경에 처하자 민씨 일가는 민족기업인 동화약방을 살려야 한다는 일념에서 재력과 사업 능력을 고루 갖춘 사업가에게 넘기기로 했던 바, 그 대상으로 선정된 사람이 윤창식이었다.
보성전문학교 출신인 윤창식 역시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있었다. 그는 1915년 민족경제 자립을 목표로 조직한 항일비밀단체인 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獎勵契) 총무로 활동하며, 일본에 탈취당한 경제권을 탈환하기 위해 각종 사업을 전개하여 민족의 실력을 키우기로 했다. 각지에서 학생과 교사를 포섭하여 회원이 130여 명에 이르렀다. 단체의 운영은 주식제도를 채택하여 1주에 20원으로 했고, 계원 한 명이 10명의 주주를 모집하기로 했다. 1917년 단체의 활동이 본격화될 무렵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해체되었고, 그로 인해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
정미업과 제염업으로 자본을 축적한 윤창식은 1937년 동화약품 사장 자리를 이어받자 독립운동단체를 지원하고 빈민을 구제하는 일에 힘썼다. 갑신정변의 주역인 박영효와 함께 빈민구호단체인 보린회(保隣會)를 적극 후원했고,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新幹會)에도 많은 자금을 지원했다.
그의 독립운동가 정신은 아들 윤광열에게 이어져 학생 광복군을 탄생시켰다. 뒷날 동화약품 사장으로 활동한 윤광열은 보성전문학교 재학 시절 상하이임시정부로 건너가 광복군 중대장으로 활약한 바 있다. 그처럼 동화약품을 이끌어온 사장들은 3대에 걸쳐 독립운동에 투신하거나 지원한 경력을 지닌 인사들이었다. 동화약품의 옛 사옥 앞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이유였다.
연통부와 교통국은 서로 다른 조직이었으나 두 기관에 같이 관여하는 사람이 많아 실제로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겹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두 조직은 한반도의 서북지방에서부터 결성되었기에 그 영향력이 중부 이남까지 골고루 미치진 못했다. 그러다 보니 중부 이남지역에서는 다른 애국단체가 그 임무를 대행하기도 했다.
아무튼 두 단체의 애국 활동은 오래 가지 못했다. 3ㆍ1만세운동이 일어난 직후인 1919년 5월부터 시작된 이들 단체의 애국 활동은 이듬해인 1920년 일부 요원들이 일본 경찰에 체포됨으로써 그 실체가 파악되어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2년에는 모든 조직이 와해되어 활동이 중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