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시간여행 제11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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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09. 4. 30. |
첨부파일 | 첨부파일없음 |
"모든 어린이가 차별 없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니고, 나라의 앞날을 이어나갈 새사람으로 존중되며, 바르고 아름답고 씩씩하게 자라도록 함을 길잡이로 삼는다." 를 조직하여 어린이날을 제정하고, 어린이 잡지를 발간하는 등 우리나라 어린이 인권 운동의선구자로서 많은 활동을 해 왔다. 1923년 3월 소파 방정환(小派 方定煥)을 중심으로 조직된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 운동 단체인 색동회는 미래의 주인공이 될 소년 소녀들을 씩씩하고 참되고 서로 사랑하며 도와 가도록 이끌고자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하여 어린이들의 민족정신을 함양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해마다 이날에는 전국 각지에서 다채로운 행사를 베풀었고, 어린이의 지위도 향상되었다. 일제의 억압으로 한때 행사가 중단된 일도 있었으나, 광복 후 재개되어, 1946년에는 국가의 정식 법령에 의하여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어린이를 존중하자!’라는 평소 선생의 뜻을 받들어 1957년 5월 5일에 어린이복지 증진을 위하여 국가, 사회, 가정이 마땅히 책임져야할 기본적인 요건을 조문화한 '어린이헌장'이 선포되었다. ♪낳으시고 기르시며 손등 야위신 내 어머니, 그 모든 슬픔 삼키시어 눈가엔 주름이네~~♪ 면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은 살아 있습니다"라는 의미의 백색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아 부모님을 향한 존경과 사랑을 전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우리나라는 범국민적 효(孝)사상 함양과 전통 가족제도의 계승 발전은 물론, 사회와 이웃에 모범이 되는 효행자, 전통 모범가정, 장한 어버이를 발굴해 포상·격려하기 위하여 1956년 국무회의에서 해마다 5월 8일을 어머니날로 정해 17회까지 행한 뒤 1973년 3월 30일,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대통령령 6615호)에서 어버이날로 개칭해 현재까지 기념식과 기념행사를 거행해 오고 있다. 몽당연필을 손에 쥔 채, “어버이 은혜에 감사 합니다”라는 글귀를 꾹꾹 눌러쓴 색종이 카네이션을 만들었던 어린시절은 누구에게나 있지 않을까? 바 쁜 일상에서 잊고 지내왔던 우리의 부모님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안부전화 한 통 드리는 봄날이었으면 한다. 이 세상에 우표가 탄생되기 이전까지는 편지를 받는 사람이 우편요금을 지불하는 등 매우 복잡한 우편제도로 인하여 많은 불편함이 있었다. 이러한 불편함을 개선하고자 영국의 교육자이자 세금 개혁가인 로랜드 힐 경은 우편 제도에 대해 개혁안을 연구, 제의하였다. 그는 1836년 12월 ‘우체국의 개혁 그 중요성 Post office:Its Importance and Practicability’이란 논문에서 우편 요금의 지불 방법으로 우체국에서 판매하는 우표를 붙이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내고 이 안을 정부에 제출하였다. 제출된 법안은 3년이 란 긴 논쟁 끝에 하원과 상원에서 통과되었고 1839년 8월 17일 빅토리아 여왕의 재가를 얻어 다음 해부터 역사적인 영국내의 균일 우편요금 제도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 새로운 개혁안에 따라 요금 선불을 위한 방법으로 우표가 창안되었고 오랜 노력 끝에 1840년 5월 6일 빅토리아여왕의 옆모습을 그린 1페니와 2펜스로 된 2종의 우표가 세계 최초로 발행되었다. 우표수집가들은 이 우표를 색깔에 따라 페니 블랙(Penny Black), 펜스 블루(Pence Blue)라는 애칭으로 부르고 있다. 러시아어로 진실이라는 뜻을 가진 프라우다(Pravda)는 구소련 공산당 공식 기관지로서 전성기 발행 부수 천 만 부로 세계 제일의 발행 부수를 자랑했다. 소련 붕괴 후 발행부수는 크게 줄었지만 아직까지 러시아에서는 제2위의 발행 부수를 가지고 있다. 구소련시절 또 하나의 기관지인 이즈베스티야와 함께 국민에 대한 당의 선전지로서 당의 정책이나 선전 등과 과학·경 제·문화·문학 등의 분야에 관한 기사 및 분석을 제공하였다. 1912년 5월 5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레닌을 비롯한 편집진에 의해 혁명세력의 기관지로 창간된 프라우다는 끊임없이 제국경찰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살아남아 혁명이후 공식적인 당 기관지로서의 위치를 굳건히 하였다. 구소련은 프라우다지의 창간일을 기념하여 5월 5일을 신문의 날로 제정하였다. 영불 해협터널은 영국과 유럽 대륙(프랑스) 간의 도버 해협을 횡단하는 철도용 해저 터널로 유로터널, 채널터널(영국명:Channel Tunnel, 불명:tunnel sous la Manche), 도버 해협 터널이라고도 한다. 영국의 포크스턴과 프랑스의 칼레를 연결하는 총 길이 55km의 이 해저터널은 1984년 12월 영국 총리 대처와 프랑스 대통령 미테랑의 파리회담에서 성사된 합의에 따라 150억 달러를 투입 7년여의 기간 끝에 1994년 5월 6일 개통되었 다. 차량과 승객을 운반하는 시속 300km의 고속열차 유로스타가 운행되며 기존에 선박으로 2시간 걸리던 도버해협 횡단을 35분으로 단축시켜 영국과 유럽을 한층 더 가깝게 만들었다. 국제 적십자사가 스위스의 인도주의자이자 적십자운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앙리 뒤낭(Henri Dunant, 1828. 5. 8~1910. 10. 30) 의 탄생일을 기념해 1947년 5월 8일을 제1회 '국제적십자의 날(Red Cross Day)'로 제정했다. 1863년 앙리 뒤낭에 의해 만들어진 적십자는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고 인간존중을 보장하는 인도주의 활동을 통해 세계평 화에 기여하는 국제기구이다. 우리나라에서의 적십자운동은 1905년 고종황제 칙령 제47호로 대한적십자 사규칙을 제정, 반포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강압으로 1909년 적십자 운동은 중단되었고 1919년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의해 부활된 후 1949년 지금의 대한적십자사로 재조직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프랑스의 정치가이자 경제학자였던 튀르고(Anne-Robert-Jacques Turgot, 1727.5.10~1781.3.18) 는 1774년 루이16세 집정 당시, 재정총감으로 영전하여 ‘파산 없고 증세 없고 모채(募債) 없다’를 슬로건으로 그의 지론인 자유 경제정책을 추진하였다. 즉, 곡물통제의 철폐, 곡물지방세 ·부역 ·길드제 등의 폐지, 지조(地租)의 징수를 계획하여 파리 고등법원에 등록하도록 하였으나(1776), 시제개혁안(市制改革案)에서 말단의 신분제를 폐지하는 대담하고 개명적(開明的)인 법안을 제출하였기 때문에 봉건귀족·고등법원의 맹렬한 반격을 받게 되어 1776년 5월에 사직하게 되었다. 그는 대표적인 저서 '부의 형성과 분배에 관한 성찰, Reflexions sur laformation et la distribution des richesses(1766)'이라는 책을 통하여 '세계역사를 통해 풍속은 점점 온화해지며, 사람의 정신은 깨어나고, 떨어져 있던 민족들이 서로 더 가까워지며, 상업과 정책을 통해 결국 세계 모든 지역이 연결된다. 또한 서서히 진행되기는 하지만 평화와 혼란, 좋은 환경과 나쁜 환경이 교차하는 가운데 인류 전체는 언제나 더 완전한 상태를 향해 전진한다.'라는 주장을 펼치며 자유경제정책의 필연성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한국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여성은 지현옥(등반대장, 1962-1999), 최오순(1970~), 김순주 (1971~)씨이다. 1993년 5월 10일 현지시간 19시 45분경, 해발 8848m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름 으로써 한국여성으로는 최초, 세계여성으로는 3번째로 에베레스트에 등정에 성공한 여성 등반대가 되었다. 이 중 지현옥씨는 1998년 7월에 여성으로서는 세계 최초로 파키스 탄령 히말라야 가셔브룸 제2봉을 무산소 단독 등정하였으며, 1999년 4월 세계에서 열 번째로 높은 안나푸르나봉을 정복하고 정상에서 내려오던 중 추락사 하였다. 1899년 5월 4일 동대문 앞 전차 보관소에는 난생 처음 보는 신기한 것을 구경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이날 거행된 역사적인 첫 전차 개통식은 동대문과 경희궁 동쪽 흥화문 구간을 운행 하였고 이어 5월 20일부터 일반 인을 대상으로 정식 운행에 들어갔다. 한성에서 전차, 전등, 전화 사업을 위해 1898년 설립된 한성전기회사가 운영하는 우리나라의 첫 전차 사업은 한성전기회사의 실제 운영을 맡은 미국인 콜브란의 주도하에 이루어 졌다. 당시 고종의 잦은 홍릉(명성황후의 릉)행차에 따른 막대한 행차비용의 절감과 백성들의 편리함을 들어 고종의 허락을 받아낸 콜브란은 선로의 부설과 전차의 운행에 대한 독점적인 지위를 행사하였고 지속적인 전차, 전기사업의 확장과 함께 훗날 대한제국
소유였던 한성전기회사를 동업자인 보스윅과 함께 자신들의 소유로 만들어버렸다. 당시 개통된 전차의 인기는 폭발적이었고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전차를 타기위해 몰려들었다고 한다. 전차가 정상 운행되고 며칠 지난 26일 파고다공원 앞에서 일어난 사고로 인해 흥분한 군중들로 인하여 3개월 여간 운행이 중단되기도 하였으나 이후 1968년까지 약 70여 년간 서울의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자립잡고 있었다. 할리우드 데뷔 첫 작품인 ‘로마의 휴일'을 통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과 함께 ‘헵번 스타일(Hepburn style)'이라는 명사를 만들어내며 일약 세계최고의 스타로 떠오른 미국의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Hepburn, Audrey, 1929.5.4~1993). 요정이라 불릴 만큼 아름다운 외모와 뛰어난 연기력은 당대의 패션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의 인기만큼 많은 영화에 출연하지는 않았지만 전쟁과 평화(1956),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 마이 페어 레이디(1964) 등 일련의 영화들을 통해 그 녀만의 매력을 충분히 발휘하였다. 아이를 기르기 위해 수많은 대작들의 출연을 거부하기도 했던 그는 은퇴 후 유니세프 친선대사로서 인도나 소말리아등 세계각지의 열악한 환경 속에 처한 아이들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현재 그의 헌신적인 노력과 1993년 암으로 사망한 그를 기리기 위해 2004년 국제연합과 민간단체가 공동 제정한 세계평화상이(오드리 헵번상)매년 수여되고 있으며 지금까지도 ‘스크린의 요정’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ECSC(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 유럽석탄철강공동체)는 1952년 석탄·철강의 생산 및 판매를 위해 창설한 공동관리 협력기구이다. 1950년 5월 9일 프랑스의 외무장관 로베르 슈만(Robert Schuman, 1886.6.29~1963.9.4)이 제창한 프랑스/독일 석탄철강공동시장 설립안에서 비롯한 것으로 공동규칙을 마련하여 카르텔을 단속하고 기업의 흡수·합병을 규제하기 위하여 설립하였다. 중앙기구인 고등기관은 생산품의 가격·생산량·할당량을 책정하며 조약의 규정을 위반한 회사들에 벌금을 부과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국가화합을 상징하는 세계적 정치지도자로 대표되는 남아공에서 가장 유명한 인사 중의 하나인 넬슨 만델라(Nelson (Rohihlahla) Mandela, 1918. 7. 18 ~). 그는 백인 지배와 인종 차별 정책을 편 아파르트헤이트 정부에 대항해 오랜 기간 투쟁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아프리카 민족회의 청소년 연맹의 공동 창시자이기도 한 그는 간디의 ‘비폭력 정신’을 본받아 1952년 남아공 '저항 운동'을 주창하였으며, 1964년에는 아파르트헤이트 정부에 의해 종신형을 선고 받아 로빈 섬에서 수감되기도 하였다. 넬슨 만델라는 1990년 석방된 뒤에는 정당간 협상에서 중심 인물로 활약해 1994년 민주 선거를 이끌어냈고, 같은 해 5월 10일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었다. 노벨 평화상 을 수상한 넬슨 만델라는 현재도 남아공의 어린이와 빈곤층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인류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철학자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5.5 ~1883.3.14)에 대하여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1.28~1895.8.5)는 '무엇보다 카를 마르크스 는 위대한 혁명가였다. 증오의 대상이 되어 극단적인 비방과 모략에 시달렸던 그는 이제 수백만 노동자 들의 사랑과 존경, 애도 속에서 눈을 감는다.'는 연설을 통하여 [인류역사 발전의 법칙]과 [자본주의 사회운동의 법칙]을 발견해냈다고 선언하였다. '유물론'과 '공산당 선언' 등으로 그의 영향력은 철학에서부터 정치, 경제학, 그리고 혁명에 이르기까지 전 분야를 휩쓸었다. 그 외에도 마르크스는 경제학 이론에 대한 최초의 저서 “경제학비판(1859)”에서는 유명한 유물사관에 대한 공식을 실었으며, 1862년에는 “자본론”을 함부르크에서 출판했다. 1913년 '기탄잘리'라는 시집을 통하여 아시아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타고르( 1861.5.7~1941.8.7 )는 근대 인도의 시인 이자 철학자, 극작가로 유명하다. 타고르는 세계 각국을 순방하면서 동서문화의 융합에 힘썼고, 캘커타 근교에 평화학당을 창설하여 교육에 헌신하였으며 벵골분할 반대투쟁 때에는 벵골 스와라지 운동의 이념적 지도자 가 되는 등 독립운동에도 힘을 쏟았다. 그가 세운 학당은 1921년에 국제적인 비스바바라티대학으로 발전하였고, 오늘날에는 인도의 국립대학이 되었다. 한국인에게는 그는 1920년 '동아일보'창간에 맞추어 기고한 [동방의 등불]이라는 시로 나라를 빼앗긴 한국민에게 큰 감동을 안겨 주어, 더욱 친근감 있는 인물로 비춰지고 있다. 40여년의 세월을 창작에 전념하여 러시아 고전주의 음악의 완성을 가져온 차이코프스키(Pyotr Il'ich Tchaikovskii, 1840.5.7~1893.11.6)는 19세기 후반 러시아악파의 중요한 일익을 도맡은 인물로 평가된다. 연주 주법상 피아노/바이올린에서 대단한 진보를 보였음은 물론, 고전적인 작품과 작용 하여 그의 음악에 신선하고 쉬운 영상(影像)을 심어줌으로써 차이코프스키음악의 독특한 매력을 지탱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또한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아 그의 작품에는 표 제음악적(標題音樂的)인 색채가 짙다. 우리에게 친근한 그의 발레곡 '백조의 호수(1876)', '잠자는 숲 속의 미녀(1889)', '호두까기 인형 (1892)'은 장대한 짜임새와 다채로운 음악으로 현대에도 갈채를 받으며 공연되고 있다. 베토벤/브람스/멘델스존과 함께 ‘4대 바이올린 협 주곡’이라는 칭호를 받는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는 그 화려함과 애절한 멜로디로 인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사실적이고 힘찬 오페라로 명성을 날린 나폴리 악파의 대표격인 파이시엘로(Giovanni Paisiello, 1740.5.9~1816.6.5). 그는 '세빌랴의 이발사 Il Barbiere diSiviglia(1782)', '사랑에 미친 니나 Nina Pazz -a per Amore (1789)'등 100곡 이상의 오페라와 종교음악, 교향곡 등을 작품으로 남겼으며, 오페라부파(가벼운 내용의 희극적인 오페라를 가리킴)분야에서 모차르트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고전 형식에 신선한 예술미와 뛰어난 새로운 기교를 융합하여 절대음악에 정진한 브람스는 온후하고 독실한 인격을 지닌 작곡가였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음악을 배우기 시작한 브람스는 코셀과 마르크스젠으로부터는 피아노와 작곡을 배웠다. 바하와 베토벤에게서는 고전적인 형식을 이어 받았고, 바하에게서는 다성적인 요소를 배워 고금에 비할 수 없는 명작들을 남겼다. 브람스는 피아니스트로도 유명하여 20세 때에는 헝가리의 바이올리니스트, 레메니(정치적 망명 으로 독일에 있었다) 와 연주회를 가졌었다. 브람스는 레메니와 여행하면서 유명한 음악가들과 접촉할 수 있었는데 하노버에서는 오아힘을 만났고, 바이마르에서는 리스트를 방문했으나 실망했으며, 뒤셀도르프에서는 슈만과 교우를 맺었다. 슈만은 그가 발간하는 음악잡지에 브람스를 크게 소개하여 브람스의 음악적인 천분을 인정하여 결과적으로는 슈만의 가장 훌륭한 후계자가 되었다. 1860년에 그는 선배들이 활약하던 빈으로 가서 본격적으로 작곡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신고 전악파'라 불리울 만큼 절대음악에 온갖 힘을 경주한 작곡가였다. 그야말로 19세기에 있어서 최후의 고전적인 작곡가로 추앙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4개의 교향곡은 그의 작품 중 가장 비중이 크다. 그 외에도 오페라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작품을 남겼는데, 특히 그의 가곡은 슈만의 뒤를 계승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가곡은 철두철미하게 낭만적인 작품이었다. 그는 낭만음악 시대의 인물인 만큼 기악곡에 있어서도 뼈대는 고전형식을 취했지만 낭만적인 정서가 풍부하게 깃들여 있다. 모라비아(현 체코)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난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5.6~1939.9.23)는 신경병리 학자를 거쳐 정신과 의사가 되어 신경증연구, 자유 연상법, 무의식 연구 등과 함께 정신 분석학의 창시자이다. 빈 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그는 뇌와 관련된 연구와 함께 마취작용 등을 연구하였고, 이후 임상에서 정신병을 앓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일하면서 인간의 무의식에 관한 강한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최면술에 의한 히스테리환자 치료법을 확립하였으나 환자의 치유에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고 새로운 치료법을 고안하였다. 이 치료법은 ‘정신분석’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이후 프로이트의 학문 이론체계를 가리키는 대표적인 말이 되었다. 그의 학설은 1900년대 초기 슈테켈, 아들러, 융 등과 같은 학 자들이 중심이 되어 프로이드학파가 탄생하였고 1908년 제1회 국제정신분석학회가 개최되기에 이르렀다. 그의 학설과 연구들은 격렬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으나 심리학, 정신의학에서뿐만 아니라 사회학, 문화인류학 등 여러 학문에 걸쳐 전반적인 영향을 주었고 프로이트를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로 기억되게 하였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인간의 심리 발달 과정과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의 이해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고 심리학, 철학, 사회학, 문예학, 교육학, 신학 등 많은 학문 영역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여는 인식의 도구로 환영받았다. 스웨덴의 기계기술자이자 발명가인 라발(Carl Gustav Patrik de Laval, 1845.5.9~1913.2.2)은 1878년 우유로 버터를 만들 수 있는 원심분리기를 발명하여 낙농에 공헌하였다. 또한, 1882년에는 드라발 터빈이라 일컫는 터빈 즉, 1분에 4만 2,000번이나 고속으로 회전하는 충동증기(衝動蒸氣) 터빈을 제작하였다. 그 후에도 고속회전을 위한 베어링의 문제, 임계속도(臨界速度) 등을 연구하여 발전기 ·펌프 등에 증기터빈을 응용할 길을 열었으며, 만년에는 야금(冶金) 분야에서 활약하여 여러 전기로를 설계하여 이후의 증기 터빈 개발 에 기초가 되었다. 제1회 노벨평화상 수상, 스위스 사회사업가 뒤낭 적십자운동의 아버지로 불리는 뒤낭(Jean-Henri Dunant, 1828.5.8~1910.10.30)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출생한 후, 부모의 영향으로 청소년기부터 환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구호하는 활동에 힘쓰고, 그의 나이 27이 되던 1855년 YMCA 창설에 참가하였다. 그 후, 1859년 6월 사업상의 일로 나폴레옹 3세를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 북부의 솔페리노 지방을 여행하던 뒤낭은 프랑스 및 사르다니아 연합군 그리고 오스트리아군 사이의 참혹한 전투가 막 끝난 카스틸료네 마을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그 곳에서 많은 전상자들이 그대로 버려져 있는 비참한 광경에 충격을 받게 되었고, 인근 마을 부녀자들과 함께 아군과 적군의 차별 없이 전상자들을 돌보아 주기 시작했다. 그 후 제네바로 돌아온 뒤낭은 솔페리노 전투의 참상과 그의 체험을 '솔페리노의 회상 (Un Souvenir de Solferino)'이라는 책으로 엮어 1862년 11월에 출판하였고 많은 사람들의 찬사와 지지를 받았다. 이 책에서 뒤낭은 상병자를 간호하기 위해 헌신적이고 자격 있는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된 구호단체를 평시에 각국 내에 설치할 것과 군대 부상병을 돌보는 군의료요원들과 군목들을 보호하고 이들의 의료활동을 보장할 수 있는 국제적인 조약을 체결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와 같은 뒤낭의 제안을 실현하기 위해 국제적십자위원회(ICRC)의 전신인 '국제부상자구호위원회'(일명 5인위원회)를 조직, 16개국 대표를 초청하여 1863년 10월 29일 제네바에서 회의를 개최하였는데, 이 국제회의를 통해 흰색바탕에 붉은 십자 모양의 표장을 선정하고, 10개 조문의 적십자규약을 채택함으로써 국제적십자운동은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왕정복고시대 귀족들과 저명인사의 초상화로 유명한 프랑스의 신고전주의 화가인 제라르(Gerard, Francois, 1770.5.4~1837)는 당대 가장 저명한 화가였던 그의 스승 다비드의 초상화보다 더욱 우아하다는 평을 받았다. 조각가 오귀스탱 파주의 문하를 거쳐 다비드의 제자가 된 제라르는 ‘큐피드와 프시케(Cupid and Psyche)’로 살롱전에서 입상하여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 인기 있던 화가 지로데(Girodet)와 라이벌이기도 하였던 그는 뛰어난 그림솜씨와 화술덕분에 많은 유력 인사들과 친분이 있었고 나폴레옹의 총애를 받는 화가로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나폴레옹의 몰락이후에도 루이 18세의 궁정화가로 계속 활약하였고 1819년 남작의 위치까지 올랐다. 섬세하고 매끄러운 화법을 이용해 마치 살아있는 대상을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뛰어난 그의 그림솜씨는 보는 이로 하여금 경탄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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