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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여행

인물과 역사를 바로 알고 현재 우리의 모습과 비교해 봄으로써 선조들의 지혜를 알아 봅시다.

지난 시간여행
제목 시간여행 제110호
등록일 2009. 4. 10.
첨부파일 첨부파일없음

해병대 창설 60주년 상세정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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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시작‘귀신 잡는 해병대’, ‘무적해병’으로 불리는 대한민국 해병대가 올해로 창설 60주년을 맞는다. ‘싸우면 반드시 승리한다!’는 신화를 가진 대한민국 해병대는 삼면이 바다인

한반도의 지리적 특성상 수륙양면작전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1949년 창설되었다. 6?25전쟁과 베트남전 등의 수많은 전투에서 용맹을 떨치며 조국과 평화를 위해 싸워온 해

병대는 지난 60년간 국토수호는 물론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그루지아, 인도, 파키스탄, 지부티 등지에 파견되어 세계평화를 위해서도 공헌해왔다.

사회
2006 경남 고성 공룡 세계엑스포 개최

내용시작1억년 전 수많은 공룡들이 노닐던 경남 고성에서 ‘2006 경남고성공룡 세계엑스포’가 개최되었다. ‘공룡과 지구 그리고 생명의 신비’를 주제로 지난 2006년 4월 14일부터 6월 4일까지 52일간 열린 ‘2006 경남고성공룡 세계엑스포’에서는 다양한 공룡의 골격과 화석을 직접 만나 볼 수 있도록 하였고 가상현실로 재현된 공룡의 세계에서 1억년 전 공룡들을 체험하는 특별한 경험을 제공하였다. 또한 국제 공룡학술 심포지엄과 국제 화석·광물쇼 등 다양한 행사가 펼쳐져 많은 관람객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1982

2006 경남고성공룡 세계엑스포 개최 기념 상세정보보기

년 1월, 경상남도 고성에서 발견된 중생대 백악기의 공룡 발자국 화석은 상족암 해안가를 중심으로 고성 일대에 분포되어 있다. 총 1만여 개에 달하는 공룡 발자국 화석은 길

이 115cm로 세계에서 가장 큰 용각류 공룡 발자국 화석과 9cm의 가장 작은 용각류 발자국 화석, 그리고 공룡알과 백악기 시대의 새 화석 등 고성은 중생대 백악기 연구에

있어 상당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 곳으로 평가되고 있다. 현재 고성은 미국의 콜로라도와 아르헨티나의 서부해안과 함께 세계 3대 공룡 발자국 화석산지로 꼽히고 있다.

4월은 잔인한 달

1986년 미국발행

내용시작 4월은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이렇게 시작되는 영국의 시인 T.S 엘리엇의 황무지라는 시처럼 4

월은 독재와 탄압으로부터 행방되기 위해 온몸이 부서지는 아픔을 참고 견뎌내며 동토의 땅을 뚫고 새로운 싹을 틔우기 위한 몸부림으로 가득했다.

미국 독립전쟁 발발

내용시작조지3세의 가혹한 식민지 정책과 터무니없는 과세정책, ‘보스턴 차 사건’과 같은 일련의 사건들이 도화선이 되었다. 그간에 자행된 식민지에 대한 불평등한 탄압과 정책에 반발해 1775년 4월 19일 렉싱턴과 콩코드에서 일어난 전투를 시작으로 8년간의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지루한 전쟁의 연속에 지친 영국은 평화를 원하게 되었고 드디어 1783년 11월 파리조약의 성립으로 미국 13개주에 대한 독립이 승인되었다.

1869년 미국발행

인도 암니챠르 학살사건 발발

1969년 인도 발행

내용시작제1차 세계대전 뒤 인도에서는 간디를 선두로 하여 인도의 독립을 위한 비폭력(非暴力) 저항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고, 이에 대한 영국측의 탄압도 가혹하였다. 4월 13일 암리차르시의 자리앙와라 바그 광장에서 영국의 인도 탄압법(彈壓法)인 로라트법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다. 이에 대하여 영국측은 무방비의 군중에게 무력제재를 감행, 약 4,000명이 죽고 약 1,000명이 부상하였다. 이 사건은 엄격한 보도관제(報道管制)로 4개월 동안이나 은폐되었는데, 이듬해 인도 국민회의파(國民會議派)에 의해 사건조사 보고서가 공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암리차르는 대량학살의 대명사가 되었다.

바르샤바 게토 봉기

내용시작나치는 유태인을 없애기 위해 1940년경부터 폴란드 전국에 산제한 300만명 이상의 유태인을 여러 도시의 게토(유태인거주지)에 분리수용하기 시작하였다. 이 중 가장 큰 것이 바르샤바의 게토로 38만명 이상이 수용되어 있었다. 도시의 중심부에 위치한 게토는 협소한 지역에 많은 인구가 집단 수용됨으로써 매우 열악한 환경에 놓여있었고 나치에 의한 유태인 대량 학살이 시작되기 이전 이미 많은 유태인이 전염병이나 기아에 의해서 사망하였다. 이러한 열악한 환경 속에 놓여있던 유태인들을 나치는 노동 켐프에 보내 편안한 삶을 주겠다고 속여 트레블링카 수용소의 가스실로 보냈다. 모든 게토에서 이송된 유태인들은 게토봉기가 일어나기 직전까지 약 30만명이 가스실에서 살해되었고 이러한 사실들이 알려지자 1943년 4월 19일 게토 유태인 지하전투조직에 의해 반란이 일어났다. 4주간의 치열한 전투 속에 수백 명의 독일군이 죽었고 6만 여명에 달하는 유태인이 죽거나 체포되었다.

1963년 폴란드발행

4월 혁명

내용시작자유당 정권은 10여년에 걸친 독재정치와 정권연장을 위한 사상유례를 볼 수 없었던 소위 3.15 부정선거를 감행하였다. 독재정권의 온

갖 비리에 항거하여 일어난 학생 시민봉기는 서울을 위시한 부산 광주 등 전국 방방곡곡에서 3.15부정선거를 규탄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시위로 불꽃처럼 맹렬히 퍼져 일어났던 것이다. 수백만의 학생들은 누구의 지시나 교도에 의한 것도 아닌 순수한 자신들의

4월혁명 제1주년 기념 상세정보보기

지성과 이성에 입각한 양심적인 판단에 의거하여 거리로 쏟아져 나와 민주주의 수호와 이승만 독재정권 타도에 앞장섰던 것이다. 이에 대해 무자비한 진압이 일어났고 결국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를 함으로써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전국에 내려진 계엄령과 더불어 날로 늘어나는 사망자의수는 급기야는 전 국민이 동참하는 분노의 불길로 번져 같고 결국 자유당 정권은 국민 앞에 무릎을 꿇고 말다.이로 인하여 자유민주주의는 소생 되었고 마침내 제2공화국의 탄생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메이저리그의 살아있는 역사

내용시작미국 프로야구의 간판 뉴욕 양키스의 홈구장인 양키 스타디움은 2008년 시즌 종료 후 기가긴 역사를 뒤로하고 퇴역할 예정이다. 1923년 4월 18일 개장된 양키 스타디움은 개장 50주년이 되는 해에 1973년 시즌 종료 후 노후로 인한 재건축을 하여 1976년 4월 15일 다시 개장한바 있다. 이후 몇 번의 증축을 통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양키스타디움은 홈런왕 베이브 루스 덕에

만들어진 구장이다. 1913년부터 뉴욕 자이언츠의 홈구장을 같이 사용하던 양키스는 1920년 레드삭스로 부터 이적한 베이브 루스가 54홈런을 기록하며 메이저리그 사상 최다관객동원을 돌파하자 자이언츠로부터 구장 공동 사용불가를 통보 받았고 이에 새로운 구장을 건설하게 되어 양키스 스타디움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루스가 세운 집이라는 ‘The house that

Ruth built’별명을 가진 이 야구장은 1923년 개장경기 당일 7만 4천여명이 모여 2만여명이 입장하지 못했다고 한다. 양키스는 2009년 시즌부터 브롱스 인근에 건설 중인 뉴 양키스타디움으로 홈구장을 옮길 계획이며 퇴역을 앞둔 양키스 스타디움에서는 역사를 기리기 위해 2008년 MLB 올스타전이 열릴 예정이라고 한다.

[좌]1998년 미국발행 [우]2001년 미국발행

정치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에게로’

1953년 러시아발행

내용시작 1917년 러시아 혁명이 한참 불붙고 있던 시기 노동자 군인 대표였던 소비에트의 지배계층인 사회주의자들은 멘셰비키를 중심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일으킨 민중의 혁명 결과를 다시금 부르주아와 손잡고 과거로의 회귀를 꾀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혼란스럽던 시기 이러한 소비에트의 성향은 볼셰비키 혁명당원으로서 탁월한 선동가이자 사상가였던 레닌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곳 ‘4월 테제’를 통해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에게로’를 외치며 자신이 꿈꾸었던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완성을 위해 기존 세력과의 단절을 포함한 철저한 투쟁을 설득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급진 노선은 같은 볼셰비키 당원에게서 조차 외면 받았다. 끈질긴 설득과 토론 끝에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킨 레닌은 이후 ‘7월 혁명’을 지나 ‘10월 혁명’을 성공리에 이루어 냄으로써 자신의 나라에 공산주의혁명정권을 수립하는데 성공 하였다.

스탈린을 비판한 공산당 제1서기

내용시작1956년 제20차 소련공산당대회에서는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반세기동안 전 소련을 통치하며 무수한 사람들을 피의 숙청으로 몰아간 공포정치의 독재자 스탈린을 비
1964년 동독발행

판하는 비밀연설이 있었던 것이다. 위험천만한 연설의 주인공은 스탈린의 사후 소련의 최고 지도자로서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와 각료회의 의장을 겸한 니키타 흐루시초프(Khrushchyov, Nikita, 1894.4.17~1971)였다.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1918년 공산당에 입당한 그는 1938년 스탈린에 의해 숙청된 코시오르의 후임으로 우크라이나 제1서기가 되었다. 이 후 제2차 세계대전에서 혁혁한 전공과 더불어 동유럽 국가들을 소련에 통합시키는 작업을성공적으로 마무리시킴으로써 스탈린의 신임을 받았다. 스탈린 사후 당 기구를 장악하고

있던 유리한 위치를 이용해 내부권력투쟁에서 승리, 1953년 9월 정적을 몰아내고 제1서기가 되었다. 그는 20차전당대회의 스탈린 비판연설을 시작으로 ‘탈 스탈린화’ 정책을 펼쳐 소련 국내정치의 민주화를 추진하였고, 미국보다 한발 앞선 우주개발등을 통해 국가의 자존심을 지키기에도 앞장섰으며 대외적으로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방국가들과 핵실험 억제 등 평화 공존 외교를 진행시켜 냉전하의 세계에 일시적인 ‘해빙’을 가져왔다. 스탈린비판에서 시작된 그의 정책들은 전 세계 공산주의 운동에 있어서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촉발시켰으며 이는 불과 30여년 이후에 이뤄진 냉전시대 종말의 시작이었다.

국제사법재판소 발족

내용시작1945년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는 국가간의 법률적 분쟁을 재판을 통해 해결하기 위해 국제사법재판소(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 ICJ)가 설립되었다. 국제연합의 사법기관으로서 국제연합 창설과 더불어 탄생한 이 기구는 연임이 가능한 임기 9년의 재판관 15명으로 구성되며, 2명 이상이 같은 나라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 있으며 3년마다 재판관 5명씩을 재 선출한다. 유엔 가입국과 국제사법재판소

규정에 명시된 가입국을 회원국으로 하며 당사국 합의하여 국제사법재판소에 법적 분쟁의 해결을 요청한 때에 관할권을 가진다. 기본적으로 상소가 불가능한 단심 재판이지만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 후 6개월 이내에 재심청구를 하였을 경우 이를 받아들여 재신이 이루어진다. 판결일로부터 10년이 경과된 후에는 재심이 불가능 하며 모든 재판비용은 당사자들이 각각 부담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1961년 유엔발행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 수립

내용시작1919년 4월 13일, 이동녕 초대 임시의정원 의장(국회의장)이 상해에서 임정수립을 눈물로써 선포하며, 국호 “대한민국”을 제정함으로써 군주제를 청산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로의 개편을 세계만방에 공식 선언 하였다. 또한, 각도 대의원 30명으로 구성된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은 임시헌장 10개조를 채택하였으며, 4월 13일 한성임시정부와 통합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 선포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내외를 연결하는 비밀 행정망인 연통제(정부 문서와 명령 전달, 군자금의 송부, 정보 보고 등의 업무 담당)와 교통국(정보의 수집, 분석, 교환, 연락 등의 업무 관장)을 운영하였고, 애국 공채의 발행이나 국민의 의연금을 통한 군자금 모금과 전달, 육군 주만 참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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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 및 한국광복군(1940) 창설을 통한 군사활동, 이봉창의 일본 국왕 폭살기도 의거(1932) 및 윤봉길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투탄 의거(1932) 등의 한인 애국단 조직활동, 파리강화회의 파견 및 구미위

원부(이승만 활동) 설치 등의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임시정부의 지도이념인 자유주의 이념과 삼균주의(三均主義) 이념은 광복이후 1948년 대한민국헌법에 반영되어 광복 한국의 기초이념이 되었다. 또

한 대한민국헌법 전문은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라고 하여 임시정부가 한국 독립의 모태가 되고 대한민국 건국의 정신적·사상적 기반이 되었음을 명시하였다.

프랑스 종교전쟁의 종식

1985년 프랑스 발행

내용시작 1598년 4월 13일 프랑스의 왕 앙리 4세가 낭트에서 공포한 칙령을 일컬어 낭트칙령이라 한다. 신교파인 위그노에게 조건부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면서 약 30년간 지속된 프랑스의 종교전쟁(일명 위그노전쟁 1562∼98)을 종식시킨 점에서 의의가 크다. 앙리 4세가 즉위할 당시 프랑스는 신 ·구 양파의 종교적 대립으로 국내는 양분되었고, 혼란이 극에 달하였다. 왕은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직접 신교에서 구교로 개종하면서 신교도(위그노)에게도 어느 정도의 자유를 인정하고자 이 칙령을 공포한 것이다.

낭트칙령의 주요 조항을 보면, 1)기정사실로 인정한 곳에서의 위그노의 예배의식 집행은 용인되나 파리 시내에서는 금한다. 2)위그노에 대하여도 재산상속 ·대학입학 ·관리취임의 권리를 인정한다. 3)이미 8년 전부터 위그노가 장악한 요새는 이후에도 신앙상의안전지대로서 장악함을 허가한다. 4)구·신 양교도 간의 분쟁을 심리하기 위하여 가톨릭교도 10명, 위그노(신교도) 6명으로 구성된 특별법정을 파리 고등법원 내에 두며, 신 ·구교 같은 수의 인원으로 구성된 특별법정을 세 곳의 지방고등법원 내에 설치함을 인정한다 등으로 되어 있다.

문화
가장 성공한 여류화가

내용시작 동시대 가장 성공한 여류화가로 평가받는 비제 르브룅((Vigee-Le Brun, Elizabeth, 1755.4.16~1842)은 뛰어난 기교를 바탕으로 섬세한 표현이 돋보이는 화풍으로 유명하다. 약 800여점이 넘는 다작의 그림 가운데 초상화가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그 분야에서 특별한 능력을 보여 주었던 그녀는 1779년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초상화를 계기로 유럽 상류사회 귀족들의 그림을 많이 남겼다. 평소 사교성이 많고 재치가 넘쳤던 그녀는 귀족들과 친분이 두터웠으며 이는 곳 그녀의 성공적인 사교계 기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프랑스 혁명과 더불어 프랑스를 떠나야 했던 그녀는 유럽 각지를 떠돌며 망명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탈리아와 러시아 등지에서 망명생활을 하였던 그녀는 그녀의 실력을 인정한 러시아 왕실과 유럽의 귀족들로부터 환대를 받으며 비교적 편

자화상 (2002, 프랑스발행)

안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프랑스 내정이 안정되어 귀국했으나 다시 런던으로 건너가 해외 생활을 계속하였고 유명 인사들과 교류하

며 화가로서 지속적인 활동을 하였다. 1837년 그녀는 ‘나의 생애의 회고(Souvenirs de ma vie)’를 통해

자신의 삶과 더불어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와 생활상을 상세히 알려주는 회고록을 남겼다.

무성영화시대에 가장 창조적인 인물

내용시작채플린(Chaplin, Charlie, 1889.4.16~1977)은 무성 영화 시대에
1989년 체코발행

가장 창조적인 인물의 한 사람이었다. 배우, 감독, 극작가, 편집, 그리고 때로는 스스로의 영화를 위한 작곡가까지도 겸임했다. 그러나 1920년대 가장 흥행에 성공한 그의 무성영화들은 한편으로는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1936년작 ‘모던 타임즈’를 비롯 ‘독재자’, ‘베드루 씨’ 등과 더불어 그의 정치적 입장은 정치가, 신문 칼럼니스트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특히 1947년의 ‘살인광시대’ 이후에는 비난이 최고조에 이르러 메카시 상원의원의 지휘

아래 공산주의자 색출을 진행시키는 상설조사위원회로부터 잦은 소환 명령을 받았다. 결국 미국을 떠나 스위스로 간 채플린에게 미국정부는 재입국 거부를 표함으로써 사실상 국외 추방을 하였다. 미국을 떠난 채플린은 영화출연보다는 자신의 작품을 재편집하거나 작곡활동에 전념했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1972년 미국 영화계는 사실상의 사죄를 의미하는 아카데미특별상을 수여하였고 비로소 조국의 땅을 다시 밟을 수 있게 되었다.

‘아웃오브 아프리카’의 주인공

내용시작 영화 ‘아웃오브 아프리카’에서 케냐를 무대로 펼쳐지는 목가적인 러브스토리를 대부분 잘 알 것이다. 덴마크 출생의 여류 작가 ‘아이작 디네센(Isak Dinesen, 본명: Blixen, Karen, 1885~1962)’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개봉된 이 영화는 메릴 스트립이 열연해 1986년 아카데미 7개 부분을 석권하며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이영화의 실제 주인공은 20 세기의 덴마크를 대표하는 소설가로서 덴마크어와 영어의 두 가지 언어를 사용해 집필활동을 하였다. 덴마크어판은 본명인 ‘카렌 브릭센’을 영문

1980년 덴마크발행

판은 필명인 ‘아이삭 디네센’을 사용하였다. 덴마크 화폐에 등장 할 정도로 국민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그녀는 이야기형식의 세련되고 낭만적인 작품들을 남기며 노벨문학

상의 후보에까지 올랐다. 세계적인 대 문호 헤밍웨이가 노벨상은 자신보다 저 아름다운 여인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말할 만큼 뛰어난 문필가였던 디네센은 자신의 자전적 소

설 ‘아프리카로부터(Out of Africa, 1937)’, ‘천사 같은 복수자들(Gengaeldelsens veje, 1944) 등의 대표작을 남기며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국민 작가로 기억되고 있다.

1978년 세종문화회관 개관

내용시작 1961년 10월 건립된 시민회관이 1972년 12월 화재로 인해 소실된 후, 서울 시민을 위한 문화 공간 제공, 연주회 주최 및 공연 등을 목적으로 서울특별시에 의해 1974년

1월 착공되어 1978년 4월 14일 개관하였다. 세종문화회관은 국제적 규모의 문화예술의 전당으로서 다양한 예술분야의 공연과 더불어 영화 상영은 물론 각종 국제회의를

할 수 있는 국제회의장, 미술품을 전시할 수 있는 전시장, 2,000~3,000명 예술분야의 공연과 더불어 영화 상영은 물론 각종 국제회의를 할 수 있는 국제회의장, 미술품을

서울특별시 세종문화회관 개관 기념 상세정보보기

전시할 수 있는 전시장, 2,000~3,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연회장을 갖추고 있다. 특히 대강당은 4,200석의 객석과 세계적 규모인 8,098본에 달하는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어 있으며 대강당, 소강당, 국제회의장등에 6개국 동시통역 시설이 갖추어진 종합 문화예술의 전당이다. 개관당시 동양 최대의 시설을 자랑했던 세종문화회관은 양재동에 위치한 예술의 전당이 개관하기 전까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명실상부한 문화의 메카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과학
근대 지도제작술의 선구자

내용시작 지도는 문자의 역사에 뒤지지 않을 만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많은 시행착오와 과정을 거치며 완성되어온 지도 제작기술은 16세기에 이르러서야 근대 지도제작술의 기초를 마련하게 된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이전까지의 세계 모습은 벨기에의 지도제작자 오르텔리우스(Abraham Ortelius, 1527.4.14~1598.7.4)에 의해 수정되기 시작하였

다. 또 한 사람의 뛰어난 지도제작자 메르카토르와 함께 당대 세계지도 제작술의 최고봉에 올랐던 오르텔리우스는 메르카토르의 도법을 이용해 최초의 대중적인 지도책을 만들어 지도의 대중화를 실현시킨 인물이다. 플랑드르 지방의 안트베르펜에서 태어난 오르텔리우스는 골동품 상인으로서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지리적 견문을 넓혔다. 1560년 평생 친구이자 경쟁자인 메르

카토르 만나 본격적인 지도제작에 뛰어들었고 이후 이집트, 아시아 등 다양한 지역의 지도와 함께 이를 한데 묶어 편집한 ‘세계의 무대 (Theatrum orbis terrarum, 1570)’라는 지도책을 출판함으로써 많은 인기를 얻었다. 53페이지 분량의 이 책자에는 약 70여장의 지도가 수록되어있으며 당대 최고의 지도책으로 지도의 대중화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오르텔리우스가 제작한 16세기 북유럽 지도

솔베이법의 발견자

내용시작 유리와 비누제조에 널리 쓰이는 소다회를 상업적으로 개발 가능한 방법인 암모니아-소다법(솔베이법)을 고안하였다. 솔베이(Solvay, Ernest, 1838.4.16~1922)는 병 때문에 대학에 가지 못하고 21세 때 숙부의 화학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861년에 무수 탄산나트륨의 제조법을 개발하였고 1863년에 최초의 공장을 설립해, 1872년까지 제조법을 완성시켜, 특허를 취득했다. 솔베이의 공장은 미국과 영국, 독일, 오스트리아에 건설되었고 오늘날 전 세계 약 70여개의 공장이

1955년 벨기에발행

가동 중이다. 그가 고안한 솔베이법의 특허는 막대한 이익을 가져왔고 그로인해 축적된 부를 자선사업

과 브뤼셀 대학에 물리, 화학 국제 연구소를 시작으로 하고, 사회학 연구소를 설립하는데 사용했다.

그는 벨기에의 상원의원을 거쳐 말년에는 국무대신을 지냈다.

수학의 천재 오일러

1957년 스위스 발행

내용시작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수학교과서에 나오는 삼각함수의 기호인 sin, cos, tan 또는 미분, 적분 등의 월리를 개발한 스위스의 수학자 오일러. 그는 좌표기하학이라고도 불리며 대수 기호 및 방법 등을 이용해 기하문제를 풀어 표현하는 근대 해석기하학과 삼각함수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또한 그는 순수수학의 창시자 중 한 사람으로서 수학·천문학·물리학뿐만 아니라, 의

학·식물학·화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광범위한 연구 활동을 하였다. 수학방면에 천부적인 자질을 가지고 있었던 오일러는 베르누이가(家)에 발탁되어 러시아와 독일 등지에서 주로 활약하였다. 연구에 몰두하면 잠을 잊을 정도로 자신을 혹사시켜 시력을 잃기까지 하였으나 특유의 강인한 정신력과 뛰어난 기억력을 바탕으로 많은 업적을 이루어냈다.

무선통신의 개척자 슬라비

내용시작 제본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아돌프 슬라비는 베를린과 포츠담의 직업학교에서 수학과 기계공학에 대하여 수업하였다. 애초 기관차의 엔진에 관한 연구를 주로 하였던 슬라비는 1883년 이후 샤를로텐부르크 기술고등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며 전기모터와 전신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지멘스의 지원을 받아 본격적으로 전기통신을 연구한 슬라비는 당시 마르코니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전파의 파장을 측정할 수 있는 공명코일을 발명하였다. 이후 마르코니 등과 협력하여 계량된 무선통신 시스템을 개발하여 무선전파통신 발달에 획기적인 성과를 가져다주었다.

1974년 동독발행

온라인미술관
르네상스시대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 빈치

2002년 모나코발행

1998년 이탈리아발행

1952년 독일발행

1979년 일본발행

내용시작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예술가이며 지구상에 생존했던 가장 경이로운 천재 중 하나로 평가 받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4.15~1519). 그는 예술가이자 사상가였으며 또한 뛰어난 과학기술자이기도 하였다. 생애동안 그가 남긴 업적과 영향력은 막대한 것으로서 동시대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천재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유명한 가문의 공증인인 피에로 다빈치(Ser Piero da Vinci)와 가난한 농부의 딸인 카타리나(Catarina)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그는 14살부터 피렌체에서 미술과 공작수업 등을 받았다. 일찍부터 실력을 인정받았던 다 빈치는 20대 후반에 들어서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고 밀라노의 스포르차 귀족 가문의 화가로 초빙되면서 다방면에 걸친 천재성을 발휘하였다. 다 빈치의 불후의 명작 ‘암굴의 성모’와 ‘최후의 만찬’이 이때 그려졌고 훗날 그 유명한 ‘모나리자’에서 보여주는 환상적인 화법의 전조를 보여주었다. 사물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이 남달랐던 다 빈치는 그의 예술적 감각을 이용 오늘날 자연과학의 분야로 분류되는 의학과 기체역학, 동물학 등에도 많은 기록과 성과들을 남겼다. 이들은 과학 문명이 비약적으로 발달된 오늘날 기준에 비춰서도 놀라울 만큼 정교하고 합리적인 연구물들로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경이를 자아내게 한다. 평생 독신으로 살며 자식을 남기지 않았던 그는 프랑스의 보아주에 가서 건축, 운하 공사에 종사하다가 그의 나이 67세에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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