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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여행

인물과 역사를 바로 알고 현재 우리의 모습과 비교해 봄으로써 선조들의 지혜를 알아 봅시다.

지난 시간여행
제목 시간여행 제121호
등록일 2009. 6. 26.
첨부파일 첨부파일없음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첫 생방송 실시 상세정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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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시작한국방송공사, KBS TV가 1983년 6월 30일부터 4개월 여 동안 24시간 생방송으로 기획한 '이산 가족을 찾습니다' 프로그램은 전국을 오열로 출렁이게 했다. KBS 청사와 여의도 광장은 헤어진 가족을 찾으려는 벽보로 가득 찼고, 산업

은행 터에 마련된 9,200여 평의「만남의 광장」에는 연일 인파가 몰렸다. 4개월 반 동안 신청 건수는 10만 9백52건, 이 중 5만 3천5백 36건이 방송되어 1만 1백89가족이 뜨거운 해후를 했다. 4백53시간45분이란 단일 주제 생방송 기록을 남

겼고, 한국뿐 아니라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방송 시작과 함께 슬프고 구성지게 울려 퍼지던 노래 '잃어버린 30년'의 노랫말을 되뇌이며, 아직도 이산의 아픔을 겪고 있는 가족들의 만남이 속히 이루어지길 기원해 본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의 의미는?

내용시작우리나라는 예로부터 한(韓), 조선(朝鮮), 동국(東國), 청구(靑丘), 해동(海東), 동이(東夷) 등과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 금수강산(錦繡江山), 소화(小華) 등의 국호로 불려왔다. '한’ 또는 ‘대한(大韓)’은 우리 민족이 한족(韓族)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생긴 말로서, 고대사회의 삼한(三韓)인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을 비롯하여, 1897년 8월 국호 로 정한 대한제국(大韓帝國),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 세운 대한민국임시정부, 그리고 오늘의 대한민

1991년 칠레 발행 상세정보보기

국은 한(韓)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의 대한민국(大韓民國)은 자유와 독립을 위해 세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신을 정통으로 이어받는

다는 의미에서, 1948년 7월 1일 열린 제헌국회 제21차 회의에서 국호로 정하였다. 헌법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명시하였고, 영

어로는 The Republic of Korea, 프랑스어로는 Republique de Coree, 독일어로는 die Republik Korea라고 표기한다.

사회
제2의 우편탄생, 우편번호제 시행

우편번호제 실시기념 상세정보보기

내용시작우편번호란 우편물의 행선지를 숫자로 부호화한 것으로서 우편물의 배달우체국과 그 관할구역의 고유번호를 말한다. 이를 토대로 한 우편번호제(Postal Code System)는 우편물을 발송할 때 수취인의 주소와 함께 우편번호를 우편물 표면 소정위치에 기입함으로써 그 부호에 따라 우편물을 보다 능률적으로 구분, 정리하고 운송하여 그 행선지까지 신속하고 정확하게 배달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이다. 우정사상 '제2의 우편탄생'이라고 불리

는 우편번호제는 1959년 10월 영국 Noriuch시에서 세계 최초로 실시하였으며, 우리나라는 1966년부터 준비하여 1970년 7월 1일 전격 실시하였다. 우정사업본부(우표발행 당시, 체신부)는 우편번호제의 실시를 축하하며 이를 국내외에 널리 알리고자 기념우표를 발행한바 있다. 제도실시 당시 5자리로 부여하였던 우편번호는 1988년 2월부터 여섯자리 숫자로 변경되어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한국의 대표음식 김치, 국제규격식품으로 공인

내용시작우리나라의 대표적 전통음식 '김치'가 국제규격식품으로 공인받았다. 국제식품규격위원회(Codex Alimentarius Commission)는 2001년 7월 5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제24차 총회를 열고 김치를 국제 규격 식품으로 승인했다. 이에 따라 '김치'는 '절임배추에 고춧가루, 마늘, 생강, 파, 무 등 여러 양념을 혼합한 뒤 젖산 생성에 따른 적정한 숙성

과 보존성이 확보되도록 저온에서 발효한 제품'으로 국제규격화 됐다. 즉, 우리 특유의 채소 가공법인 김치담금의 특성이 모두 인정된 것이다. 국제식품규격위원회의 공인에 따라 김치는 'kimchi'라는 영문 명칭으로 국제적으로 통용되었으며, '기무치(Kimuchi)'란 일본식 이름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됐다. 그동안 김치는 ‘원조’ 이미지를 강

조하며 국제적 인지도를 높여왔다. 이에 대해 일본의 뛰어난 식품기술로 가공된 ‘기무치’는 소비자 기호에 맞는 발빠른 전략으로 김치를 위협해오던 상황에서 일본이 ‘기무치(Kimuchi)’를 국제식품규격(코덱스)에 등록하려다 2001년 7월 5일 국제식품규격위원회가 ‘김치(Kimchi)’를 국제규격식품으로 공인한 것이다.

한국의 전통음식 시리즈(첫번째묶음)-김치 상세정보보기

빈민굴에서 시작된 사회봉사 네트워크, 구세군 창립

내용시작구세군 창립자인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 1829.4.10~1912.8.20)는 영국 노팅험(Nottingham)에서 태어났으며, 1855년 6월, 나중 ‘구세군의 어머니’로 알려진 캐서린 멈포드와 결혼하여 9명의 아이를 키웠습니다. 14세에 아버지를 잃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전당포에서

일했던 그의 유년시절은 가난한 삶과 가까웠다. 15세 때 신앙을 가지게 되어 감리교회의 목사가 되었다가 1861년에 사임한 부스는 1865년 7월 2일 동부 런던의 빈민굴에서 전도하기 시작한 것이 구세군(창립당시 '그리스도교 전도회_Christian Mission‘라 칭함)의 발단이 되었

다. 구세군을 조직한 부스는 서민층을 상대로 동부지역 빈민가 등을 찾아가 노방전도를 했으며, 그리스도 신앙의 전통을 따르는 교리를 가지고 선도와 교육, 가난구제, 기타 자선 및 사회사업을 전개하였다. 또한 그의 저서인 '암흑의 영국에서(1890)'는 당시 빈민들의 실정

1978년 모나코발행

과 그 구호책을 제창한 명저로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구세군은 그의 생존시에 영국을 비롯한 세계 58개국에 걸쳐 설립되었으며, 오늘날에는 전세계 108개 국가에서 지속적인 사회봉사를 펼치고 있다. 구세군의 창립자 부스가 평생의 목표를 발견한 곳은 바로 런던의 빈민굴에서 하던 설교를 통해서였으며 바로 그곳이 구세군이 시작된 곳이었다.

우리나라 전시/컨벤션산업의 역사, 한국종합전시장 개관

내용시작국제적인 전시회 및 회의 개최를 통한 국제교류의 장을 마련할 목적으로 1979년 3월 개관한 한국종합전시장인 코엑스는 개관당시 KOEX라는 영문표기를 사용하였다. KOEX는 개장 당시 단일 전시시설로는 동양최대의 위용을 과시하였으며 우리나라의 국력 신장을 표현하는 국가 상징적 시설로 주목을 받았다. 그 이후 무역협회가 출자한 별도 법인이 1986년 5월 설립되었고, 1998년 7월 3일 Convention & Exhibition의 이니셜을 표기한 COEX(코엑스)라는 명칭을 공식화 하였다. 주요 시설은 크게 전시장과

한국종합전시장 개장기념 상세정보보기

컨벤션센터 회의실로 구분되며, 전시실은 다시 태평양홀/대서양홀/인도양홀/컨벤션홀로 세분된다. 2000년 10월 제3차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개최를 비롯해 노벨

평화상 100년전, 만국우편연합 서울총회, 세계광고대회, 인터폴 서울총회, 세계무역센터협회 총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제워크숍 등 각종 전시회 및 국제회의

등을 개최하였다. 금년 7월 30일부터 8월 4일까지는 인도양홀에서 필라코리아 2009 제24회 아시아국제우표전시회가 개최될 예정이다.

수영복 패션의 핵폭탄, 비키니 수영복 등장

내용시작1946년 7월 1일, 미국은 태평양 마셜제도에 속한 산호초 비키니에 기자단을 불러 놓고 공개 핵실험을 가졌다. 일본 나가사키에 떨어졌던 폭탄과 같은 위력을 가진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아름답던 바다는 순식간에 불바다가 됐다. 나흘 뒤인 7월 5일,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충만하던 프랑스 파리의 한 수영장에서도 관중의 넋을

잃게 만드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유인즉, 파리 모리토르 수영장에서 열린 수영복 대회에서 자동차 기술자 출신의 루이 레아드(1897-1984)가 만든 수영복 때문이었다. 모델이 남자 손수건 절반만한 크기의 천으로 가슴과 아랫도리를 가리고 나온 것.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는 다리를 노출시키는 것만으로도 외설이라 생각되던 시기였던 터라,

아무리 수영복이라도 배꼽과 허벅지가 나온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도 비키니 수영복의 모델이 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키니를 만든 레아드는 카바레 스트립 댄서인 미셸 베르나르디니를 기용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방송매체는 그럭저럭 괜찮은 평을 내놨지만, 반대 여론은 직선적이었다. 바티칸은 '부도덕'하다고 비난

관광통신일부인-태안우체국 만리포해수욕장 임시출장소 상세정보보기

했고, 이탈리아와 스페인, 포르투갈은 법적으로 비키니를 입는 것을 금지시켰다. 구 소련은 '퇴폐적 자본주의의 또 다른 샘플'이라고 매도했다. 며칠 전의 핵실험 장면을 떠올린 디자이너 루이 레아드는 자신이 만든 수영복에 ‘비키니’라는 이름을 붙이고 상표로 등록했다. 비키니 수영복은 시대적 상황에 의해 처음부터 성공적 인 출발을 보이지는 못했지만, 1960년대 프랑스 여배우 브리지트 바르도가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에서 비키니를 입고, 브라이너 헤이랜드가 비키니를 주제로 부른 노래가 히트되면서 대중화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에는 1961년에 (주)한국샤크라인의 전신인 백화사가 상어표 수영복이란 브랜드로 수영복 시장이 열렸다.

붕괴 2년 8개월만에 재개통된 성수대교

내용시작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가 붕괴됐다. 출근길 차량들로 붐비는 아침 7시40분쯤, 성수대교 북단 5번째와 6번째 교각 사이 상판 50여m가 "꽝" 소리와 함께 북쪽 상판 이음새가 먼저 끊어지고 이어 남쪽 상판이 떨어져 나갔다. 버스와 승용차 6대가 상판과 함께 강물로 추락하고 북쪽으로 달리던 시내버스는 끊긴 다리 끝부분에 뒷바퀴가 걸리면서 한바퀴 빙글 돌아 떨어졌다. 사고현장은 비바람 속에 휴지

한국의 다리 시리즈(네 번째 묶음) 상세정보보기

처럼 구겨진 추락차량과 피투성이가 된 희생자들로 뒤범벅돼 있었고 바닥과 천장이 닿을 정도로 찌그러진 버스에서 학생들의 책가방, 안경, 볼펜, 도시락들이 비죽비죽 튀어나와 있었다. 이날 사고로 무학

여중고생 9명을 포함, 모두 32명이 사망하고 17명이 부상했다. 성수대교 참사는 단순히 콘크리트 건조물 하나가 무너진 붕괴사고가 아니었다. 다리와 함께 온 국민의 가슴이 무너져 내렸고, 나라가 함께 무너

져 내렸으며 한국적 성장신화의 부끄러운 이면을 드러내는 극적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1997년 7월 3일, 32명의 귀중한 인명을 앗아갔던 성수대교가 붕괴 2년8개월 만에 재개통됐다.

정치
아메리카합중국 독립 선언

내용시작1775년 영국 국군과 아메리카 식민지군 사이에 무력충돌이 발생하여 식민지의 반영(反英)항쟁은 무력항쟁 단계로 접어들었다. 그때 만해도 식민지측은 본국으로부터 독립할 것은 생각하지 않고 영제국(英帝國)의 일환으로서 머무를 생각이었다. 그러던 중 대내외적으로 외국원조를 받아야 할 필요와 더불어 내부적으로는 급진파 대두, T.페인의 공화제 독립(共和制獨立)을 호소하는 정치 팜플렛 '커먼센스, common sense'등의 영향으로

독립의 기운이 고조되었고, 제2차 대륙회의(大陸會議)는 76년 5월 각 식민지에 대하여 새정부의 수립을 권고하였다. 각 식민지는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고, 사실상 독립 상태로 들어갔다. 한편 대륙회의에서 버지니아 대표 R.H.리의 독립의 결의(決議) 제안에 따라 6월 7일에 5인 기초위원이 임명되었다. 원안은 위원의 한 사람인 T.제퍼슨이 기초하였고, 역시 위원인 B.프랭클린과 J.애덤스가 약간 가필하여 대륙회의에 제출하여 7월 4일 전원일치로

가결, 공포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독립선언이다. 이 독립선언문은 생명, 자유 및 행복의 추구라는 천부의 권리가 존재함을 지적하면서 그 권리의 확보를 위하여 정부가 조직되어야 하며 정부의 정당성은 ‘피치자(被治者)의 동의(同意)’에 유래한 것이라고 말하여 혁명권(革命權)의 존재를 주장하였다. 그 후, 미국과 영국 제국은 1783년 파리 조약으로 평화 협정을 맺었고 영국은 미국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1976년 미국 발행

이탈리아의 국민영웅, 통일운동가 가리발디

내용시작이탈리아의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을 받는 가리발디(Giuseppe Garibaldi, 1807.7.4~1882.6.2)는 니스에서 선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르디니아 해군에 복무 중 청년 이

탈리아당의 혁명운동에 가담하였다가 1834년 관헌에 쫓겨 프랑스로 피신하였다. 프랑스에서 남미로 건너간 그는 리오그란데와 우루과이의 독립전쟁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

다. 1848년 해방전쟁이 일어나자 귀국, 의용군을 조직하여 참가하였으나 패배한 후 로마의 혁명공화정부에 참가하여 나폴레옹 3세의 무력간섭에 대한 방어전을 지휘하였

1957년 이탈리아  발행

다. 이듬해 공화정부가 붕괴되자 뉴욕으로 망명하였다가 1854년 귀국하여 카프레라섬에서 살았다. 이 무렵 공화주의로부터 사르데냐왕국에 의한 이탈리아통일주의로 전향, 1859년의 해방전쟁에서는 알프스 의용대를 지휘하였고, 이듬해 5월에는 ‘붉은 셔츠대’를 조직하여 남이탈리아왕국을 점령, 사르디니아왕에 바침으로써 이탈리아통일에 기여하였다. 평민 출신인 가리발디는 애국심이라는 새로운 뜻으로 민중을 일깨우는 과업을 카보우르나 마치니보다 훨씬 잘 수행했다. 게다가 자신의 군사적·정치적 재능을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라는 대의(大義)에 이용한 것이 당시의 조류와 잘 맞아떨어져 그에게 커다란 갈채를 안겨주었다. 더불어 자신의 부귀영화에는 관심이 없는 정직한 인격으로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다.

독일의 여성해방운동가 체트킨

내용시작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 공산당과 코민테른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독일의 여성해방운동가 클라라 체트킨(Clara Zetkin, 1857.7.5~1933.6.20). 그녀는 독일 사회민주당에서 활동하며, 사상적으로는 당내의 수정주의에 반대하는 좌익계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주로 문화운동과 여성운동에 종사하였다. 1889년 제2인터내셔널의 창립대회에 참가하고, 1892~1916년 사회민주당의 여성지 '평등, Gleichheit'을 창간, 편집하였다. 또한 1907년 최초로 국제사회주의여성회의를 개최하여 반전(反戰)운동을 국제적으로 전개하고, 1918년에는 독일 공산당의

1957년 독일발행 상세정보보기

창설자로 1919년 당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24년 레닌 사망 후, 그녀의 영향력은 대폭 줄어들었으

나, 1932년 8월 나치스(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가 제1당이 된 국회에서 최연장 의원으로서 임시의

장이 되어 230명의 나치스 의원단 앞에서 반(反)파쇼통일전선의 결성을 호소한 일은 유명하다.

‘슈만플랜’ 주창자, 프랑스 외무장관 로베르트 슈만

2000년 룩셈브르크발행

내용시작ECSC(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 유럽석탄철강공동체)는 1952년 석탄·철강의 생산 및 판매를 위해 창설한 공동관리 협력기구이다. 1950년 5월 9일 프랑스의 외무장관 로베르 슈만(Robert Schuman, 1886.6.29~1963.9.4)이 제창한 프랑스/독일 석탄철강공동시장 설립안에서 비롯한 것으로 공동규칙을 마련하여 카르텔을 단속하고 기업의 흡수·합병을 규제하기 위하여 설립하였다. 중앙기구인 고등기관은 생산품의 가격·생산량·할당량을 책정하며 조약의 규정을 위반한 회사들에 벌금을 부과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문화
식민지시대 미국의 가장 뛰어난 예술가, 코플리

내용시작보스턴 출생으로 독학으로 공부한 미국의 화가 코플리(John Singleton Copley, 1738.7.3~1815.9.9)는 초상화를 주로 그렸으나 역사화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는 식민지시대에 번성한 초상화 유파에 들어가 초상화를 개발했고 초상화가로서 가장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코플리는 초상화에서 로코코 양식의 무대장치를 충분히 활용했는데, 이렇게 주인공을 일상생활과 밀접한

기물과 함께 그리는 'portrait d'apparat'는 18세기 미국 회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생생함과 날카로움을 그의 작품에 부여해주었다. 출세작 '왓슨과 상어, Watson and the Shark(1778)'에서 코플리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투쟁을 주제로 다루었는데, 이것은 19세기 낭만주의 미술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며 영국낭만주의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65년 미국 발행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도서 출간

내용시작 마가렛 미첼(Margaret Mitchell, 1900.11.8~1949.8.16)의 유일한 작품으로 집필기간이 무려 10년(1926~36)에 이르고, 천페이지가 넘는

대작으로 평가받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는 총 5부작으로 이루어진 대하드라마다. 남북전쟁(1861~65)과 패전,

재건시대의 급변하는 사회상을 조지아 주를 배경으로 아름답고 강인한 스칼렛 오하라의 인생과 파란만장한 사랑이야기를 세밀하게 그려

2000년 미국 발행

내고 있다. 그에 비해 연약한 이상주의자 애슐리 윌크스에 대한 스칼렛 오하라의 사랑, 물질주의적이며 행동가인 레트 버틀러와의 애증 등을 한데 엮은, 간결한 문체와 정교한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1936년 6월 30일 첫 발행 후 1년 동안에 150만 부가 팔렸으며 10여개 국어로 번역되어 세계적인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1936년 퓰리처상을 받았으며, 1939년 빅터 프레밍 감독이 비비안 리(스칼렛 역), 클라크 게이블(레트 역) 주연으로 영화화되어 아카데미상 10개 부문을 휩쓸기도 하였다. 한편 1991년 미국 소설가 A.리플리가 속편격인 '스칼렛'을 써서 40여 개국에서 번역되었다.

‘어린왕자’의 저자, 생텍쥐페리 출생

내용시작프랑스의 소설가 생텍쥐페리(Antoine-Marie-Roger de Saint-Exupéry, 1900.6.29~1944.7.31)가 쓴 불후의 명작 ‘어린왕자’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로서 인간의 고독에 대한 원초적인 질문과 해답을 제시한 시적이며 아름다운 분위기의 휴머니스틱 한 작품이다. 진정한 의미의 삶을 개별적인 인간 존재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정신적 유대에서 찾으려 했던 몰락한 귀족가문 출신이었던 그는 군복무 동안 조종사 면허를 취득한 후, 1926년 툴루즈의 라테코에르사(社)에 들어가 아프리카 북서부와 남대서양

및 남아메리카를 통과하는 항공우편항로를 개설하는 데 이바지했다. 1930년대에는 시험비행사와 에어프랑스항공회사의 홍보 담당자 및 [파리 수아르 Paris-Soir]지 기자로 일했다. 심한 비행기 사고로 평생 불구가 되었지만, 1939년에 육군 정찰기 조종사가 되었다. 그는 비행에서 영웅적 행위의 원천과 새로운 문학적 주제를 발견했다. 그의 작품들은 목숨을 내건 위험한 모험이야말로 인간의 소명을 가장 숭고하게 실현하는 것이라고 찬양했다. 언제나 어려움과 역경과의 싸움에서 인간이 삶을 영위해 나가

는 의의를 찾는 내용의 “남방 우편기, Courrier Sud(1929)”, “성채_城砦, Citadelle(1948)”를 저술 하였고, 아르헨티나 항공 근무시절의 경험을 토대로 한 “야간비행, Vol de nuit(1931)”을 저술하여 행동적인 문학으로서 A.지드의 격찬을 받으며 페미나상(賞)을 받았다. 또한 자신이 직접 삽화를 넣어 독특한 시적세계를 다룬 “어린왕자, Le Petit Prince(1943)”는 그를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한 작품이 되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정찰비행 임무를 수행하다가 격추 당해 행방불명되었다.

1995년 아르헨티나 발행

미국의 작곡가, 작사가 로서 출생

내용시작'진정한 노력 없이도 성공하는 방법, How to Succeed in Buisiness

Without Really Trying'으로 1962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작곡가겸 작사

가인 로서(Loesser, Frank, 1910.06.29~1969.07.28). 그에게 피아노

를 가르쳤던 그의 아버지는 어린시절 대중가요에 대한 그의 관심을 돌리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는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했고, 뉴욕 시티 칼리지를 중퇴한 후로는 1920년대말 음악출판사에서 작사가의 자리를 얻을 때까지 음악과는 상관없는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그의 작품은 “내가 쌍둥이라면, I Wish, I Were Twins(1934)”이 팻츠 월터에 의해 녹음되기 전까지는 거의 발표되지 않았다. 1936년 할리우드로 간 그는 그곳에서 작사가로서 재능을 인정받았다.

과학
미,소 공동 우주계획 협상의 주역, 물리학자 드라이든

내용시작7년간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부국장을 지내기도 한 미국의 물리학자 드라이든(1898. 7. 2~1965. 12. 2)은 1920년 볼티모어의 존스홉킨스 대학을 졸업한 뒤 워싱턴에 있는 국립표준국의 공기역학과 과장으로 임명되었다. 고속 공기역학 분야에서 선구적인 업적을 남겼으며 음속에서 날개 표면 부근의 공기 흐름에 대한 연구를 처음으로

수행했다. 1934년 역학부 및 음향부의 부장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국립국방 연구위원회(NDRC)의 '워싱턴 계획'을 맡아 미국 최초의 성공적인 유도 미사일인 배트 레이더 유도 미사일(Bat radar-homing missile)을 개발했는데,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미해군이 대일본전에 사용 되었다. 1947년 국립표준국에서 물러나 미

국항공자문위원회(NACA)의 항공학 연구부 책임자가 되었다. 2년 뒤에는 NACA 회장이 되었으며 그의 재임기간 동안 이 기구는 진보한 항공학 연구와 개발로 명성을 얻었다. 1958년 NASA의 부국장이 되었고, 1962년에는 미·소 공동 우주계획을 위한 협상을 이끌어 낸 장본인으로 기록된다.

1989년 미크로네시아발행

화성탐사선 패스파인더 화성 착륙

내용시작패스파인더는 '선도자'라는 뜻으로 화성 탐사선의 이름이다.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진행한 화성 탐사 계획 '디스커버리 프로젝트' 중 하나로 화성에 생명체가 존재하는지 여부와 과학기지 건설을 위한 각종 조사 작업 등을 목표로 하였다. 이 우주선은 1996년 12월 4일 발사되어 1997년 7월 4일 약 1억 9100만 km를 비행한 끝에 화성에 도착하였다. 우주 로켓 발사 역사상 최초로 착륙에 에어백을 사용하기

도 하였다. 활동기간은 1화성년(687일)이며, 내부에는 6개의 바퀴가 달린 탐사 로봇 소저너(Sojourner)가 탑재되어 있다. 소저너의 활동기간은 당초 1주일로 예상하였으나 6주 이상 활동하였다. 1997년 7월 4일 화성에 착륙하여 화성 표면 사진을 지구로 보내왔다. 패스파인더호 이후 랜더호와 글로벌 서베이어호가 계속해서 화성을 탐사했다. 특히 글로벌 서베이어호가 보내온 화성 표면 사진에서 호수나 얕은

바다가 있어야 생성되는 충적층이 발견되어 화성에 물과 생명체가 존재했을 것이란 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제시되기도 했다. 지속되어온 화성탐사 연구는 2008년 5월 25일 화성 탐사로봇 피닉스호가 "로봇팔을 이용해 화성 표면에서 파낸 물체의 사진을 분석한 결과 얼음이라는 증거를 찾아냈다"고 NASA가 밝힌 바 있다. 화성은 미·러 양국을 위시하여 새로운 우주개발의 전초기지 대상이 되고 있다.

1997년 미국 발행

금주의 노벨상

노벨문학상 "행복하다는 것은 소망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 헤르만헤세

2002년 독일 발행내용시작 남독일 뷔르템베르크의 칼프에서 출생한 헤세(Hermann Hesse, 1877.7.2~1962.8.9)는 천성적인 자연아(自然兒)로서, 개성에 눈뜨면서 미래의 시인을 꿈꾸며 신학교(마울브론신학대학)의 속박된 기숙사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그곳을 탈주, 한때는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한 것으로 전해진다. 시계공장에서 3년간 시계 톱니바퀴를 닦으면서 문학수업을 시작한 그는 1895년 가을 튀빙겐의 서점에서 다시 수습점원이 되는 한편, 여가에 낭만주의 문학에 심취, 처녀시집 '낭만적인 노래, Romantische Lieder(1899)'를 통해서 문단에 데뷔하였다. 인간의 위기에 대한 심오한 감성을 지닌 작가로서, 카를 구스타프 융의 제자 J. B. 랑과 함께 정신분석을 연구했으며 융과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분석의 영향이 '데미안, Demian(1919)'에 나타나는데, 이 소설은 고뇌하는 청년의 자기인식 과정을 고찰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곤경에 빠진 독일 국민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그는 유명해졌다. 단편집, 시집, 우화집, 여행기, 평론, 수상(隨想), 서한집 등 다양한 종류의 간행물을 쓴 헤르만헤세는 20세기의 문명비판서라 할 수 있는 미래소설 '유리알유희, Das Glasperlenspiel(1943)'를 통해서 194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헤세는 인간의 본질적인 정신을 찾기 위해 문명의 기존 양식들을 벗어나 인간을 주제삼은 그의 작품들을 통해서, 세상을 떠난 후 영어권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자리매김 하였다. 노벨 문학상과 괴테상을 동시에 수상한 20세기 최고의 작가로 손꼽힌다.

노벨평화상 국제노동기구(ILO)창설자, 주오

1945년 UN 발행내용시작 프랑스의 사회주의자이자 노동조합 지도자였던 주오(Léon Jouhaux, 1879. 7. 1~1954. 4. 28) 16세부터 성냥공장에서 일했으며, 곧 혁명적 생디칼리슴의 지도적인 선전가로 성장했다. 노동총동맹(CGT)에 가입, 활약하였는데, 1909년부터 38년간 서기장을 지냈다. 원래 아나르코 생디칼리슴(anarcho-syndicalisme:무정부주의에 의한 혁명적 노동조합주의)을 신봉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하여 ‘계급 협조주의자’가 되었다. 국제노동기구(International Labor Organization) 창설자의 한 사람으로, 국제노동조합연맹 부회장을 지냈다. 1949년 국제자유노동조합연맹(International Confederation of Free Trade Unions/ICFTU) 창설을 도왔고, 1951년 11월 5일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온라인미술관
바로크 건축의 최고걸작을 남긴 건축가 치머만
1985년 독일 발행

내용시작회반죽 장식가로 건축계에 입문한 독일의 건축가 치머만(Dominikus Zimmermann, 1685. 6. 30 ~ 1766. 11. 16)은 바로크 건축 전문가로, 그가 비스에 지은 교회는 바로크 건축의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그는 대부분의 건축활동을 2채의 '종합 예술작품' 건물을 짓는 데 바쳤고 형(요한 밥티스트 치머만)과 함께 구조 및 장식의 거의 모든 부분을 직접 설계하고 시공했다. 이 구조물은 가볍고 경쾌한 구조, 우아한 채색으로 물이 흐르는 듯 물결치는 회반죽 장식과 프레스코 때문에 로코코 양식의 참모습을 띤 첫 번째 교회로 평가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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