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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여행

인물과 역사를 바로 알고 현재 우리의 모습과 비교해 봄으로써 선조들의 지혜를 알아 봅시다.

지난 시간여행
제목 시간여행 제133호
등록일 2009. 9. 18.
첨부파일 첨부파일없음

한국가톨릭 순교자 103위 성인 승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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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시작한국에 천주교(Catholic Church)가 처음 전해진 것은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명나라에 사신으로 왕래한 이수광이 M.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 '중우론(重友論)'등을 그의 저서'지봉유설(芝峰類說)'에 소개한데서 비롯된다. 한편, 이수광과 같은 시대의 허균(許筠)도 베이징(北京)에 서 천주교의 12가지 기도문인 '십이단(十二端)'을 가지고 귀국하였는데,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자로 기록된다. 최초의 조선천주교회는 1784년 2월중국어 역관 김범우(金範禹)의 집 대청에

서 주일미사를 드리면서 시작되었고, 이때부터 한국의 천주교는 박해가 계속되는 형극(荊棘)의 길을 걸어야 했으며, 그러한 박해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6·25전쟁 때까지 계속되었다. 91년 조상의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고발로 이른바 ‘진산사건(珍山事件)’, 1801년 신유(辛酉)박해 및 오가작통법 시 행,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대원군 집정당시의 병인박해 등으로 수많은 조선의 천주교인들은 목숨을 잃어야 했다. 또한 일제강점기에는 창씨개명 및 신사참배 등을

강요하는 한편, 각 교구의 외국인 성직자를 가두었다가 미국인 성직자는 본국으로 추방하고,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한국인 신부들을 구속하는 등 온갖 횡포를 자행 하였다. 이러한 박해 속에서 죽어간 신도가 병인박해에서만 1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의 성심을 기리기 위하여 1983년 로마 카톨릭교황청의 교황 요한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 1920.5.18~2005.4.2)는 103명의 한국 가톨릭 순교자를 성인으로 승품시켰다.

사회
민방위대 발대식, 전국에서 시작

내용시작1976년 9월 15일 우리나라에 민방위대가 창설되었다. 우리나라 민방위대는 1975년 8월 26일 민방위 기본법의 발효에 따라 그해 9월 15일에 조직 편성됨으로서 우리나라 민방위의 획기적인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 후 9월 22일 민방위대가 전국적으로 발대식을 갖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민방위대는 적의 침공이나 자연 및 인위적인 재난으

로부터 우리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화된 자위수단으로서 창설되었으며 정부의 지도하에 방공, 응급적인 방재, 피해복구 및 구조 활동 등 일단 유사시에 대처 할 수 있는 역량을 기르고 국민총화 대열에 앞장서 내 마을, 내 직장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지켜나갈 것을 생활화하는 기반을 닦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민방위대창설 1주년 기념 상세정보보기

극동 최초, 팬텀기 부대 창설

내용시작1960년대 말 계속되는 북한의 도발에 따라 우리정부는 전반적인 국군의 군사력 강화가 시급하다고 판단, 미국에 전력증강을 요청하였다. 전력증강을 위한 1년여 동안 치밀한 외교전을 펼친 끝에 미국 정부가 동맹국에 지원하는 특별군사

원조금을 받아내기에 이르렀고 이와 함께 육, 해, 공군의 전반적인 전력증강을 착수하게 되었다.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작성된 한국의 전력 증강 기본 계획은 미군이 도착할 때까지의 기간을 45일로 보고 그 기간 동안 북한

군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전쟁물자 비축과 우리 국군의 전반적인 전력을 증강하는 것이 그 핵심 내용을 이루고 있다. 이 계획에 따라 공군의 핵심 전력증강사업의 일환으로 공군 비행장 개선을 포함하여 새로운 전투기의 도입을 추진하였

공군창설 20주년 기념 상세정보보기 상세정보보기

고 그 결과 월남전과 중동전에서 탁월한 제공능력을 인정받은 당시 최신예 전투기인 F-4 팬텀을 도입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초 미국은 생산중단에 처한 F-102기를 한국에 강매 할 예정이었으나 당시 베트남전에서 한국의 추가파병 또한 절실한 터인지라 결국 우리정부의 요청을 수락하여 팬텀기 18대 1개 대대를 한국에 판매하였다. 1969년 8월에 인도된 F-4D 팬텀은 당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의 전폭기로서 한국동란 이후 1961년 도입된 F-86F과 1965년 도입한 F-5A에 이어 이후 40여 년간 한국공군의 주력 전투기로 운용하게 되었다.

’82 서울국제무역박람회 개막

내용시작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82 서울 국제 무역 박람회(SITRA 82)가 1982년 9월 24일부터 10월 18일까지 25일간 한국 종합 전시장에서 개최되었다. ’82 서울국제 무역 박람회는 세계 각국으로부터 약 200여개의 해외 업체와 600여개의 국내 업체가 참가하여 상품과 기술을 전시하는 한편, 각국별로 문화 행사를 곁들여 명실상부한 국제 수준의 종합 무역 박람회로서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이 박람회를 통해 국제간의 무역 확대에 의한 공동 번영 추구라는 강렬한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고, 80년대 중반 1,000억불 이상의 무역 규모를 갖는 대형 무역국으로서 성장해 나갈 수 있는 우리의 잠재력을 국제 사회에 과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82서울 국제무역박람회 기념 상세정보보기

여객선 에스토니아호 침몰, 대참사

내용시작 자연으로 인한 것이든 인간으로 인한 것이든, 세계 최악의 재앙은 쉽사리 잊혀질 수 없다. 1980년 세인트헬렌스 화산 폭발이나 1989년 캘리포니아의 로나 피에타 지진 등 엄청난 대재앙 및 2001년 9월 11일의 미국대폭발테러사건 등은 지금도 우리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남아

있다. 그 중, 끔찍한 인재(人災)중의 하나로 손 꼽히는 여객선 '에스토니아호'침몰 대참사도 그 중 하나라 할만하다. 1994년 9월 27일,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을 출발하여 다음날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 도착할 예정이던 여객선 에스토니아호가 989명의 승객과

승무원을 태운 채 28일 새벽2시 경에 침몰했다. 생존자는 겨우 137명. 850여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대규모 조난 사고였다. 사고 대부분의 승객이 잠든 새벽에 일어났고, 선장은 여객선의 침몰이 확실해진 후에야 첫 번째 경고방송을 내보냈으나, 대부분의 승객은 에스토니아어

1998년 마다가스카르 공화국 발행

로 나온 경고 방송을 알아듣지 못했다. 에스토니아호 생존자들의 면면은 냉혹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 준다. 생존자의 3분의 1 이상은 승무원이었고 대부분 젊은 남자였다. 55세 이상 의 생존자는 7명뿐이었고 12세 미만의 생존자는 없는 것으로 기록된다. 가장 치열하고 이기적인 생존 경쟁을 경험한 생존자들은 아직도 그 때의 공포를 잊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스웨덴 정부가 선체와 사체 인양을 포기함으로써 희생자들은 아직도 바다 밑에 남아있다.

인류 최초의 항공우편

내용시작몽골피에형제가 1783년 열기구의 실험에 성공한지 80여년이 지난 1870년. 당시 파리는 보불전쟁으로 인하여 프로이센군대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다. 프랑스의 실추된 황제의 명예를 살리고 유럽의 주도권을 잡고자 나폴레옹 3세에 의해 일어난 프랑스 - 프로이센간의 전쟁은 당시 프로이센연합군의 치밀한 계획에 말린 프랑스군이 커다란 힘도 못써보고 파죽지세로 밀리는 일방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었다. 당시 파리에서는 1870년 9월 4일

1955년 프랑스발행

황제 폐위와 제3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새로운 국민방위군 정부가 권력을 장악하고 저항하였으나 곧 프로이센군대에 의해 개전 2개월여 만에 파리를완전히 포위당한 체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9월 19일부터 포위된 파리는 외부로부터 완전히 차단되었고 모든 물자의 수송 또한 중단되었다. 포

위가 지속되자 외부와의 연결수단을 찾던 파리에서는 열기구에 의한 물자와 우편물의 수송을 시도하게 되었다. 1870년 9월 23일 첫 번째 기구가 띄워져 고립된 파리의 외부로 우편물을 실어 날랐고 이것은 곳 인류최초의 항공우편이 되었다. 기구에 의한 우편물의 수송은 이듬해인 1871년 1월 22일까지 총 65대

의 기구가 이용되었으며 임시정부 수반이던 레옹 강베타는 포위된 파리에서 기구를 타고 탈출에 성공한 뒤 지방에서 새로운 프랑스 군대를 조직하여 대항하기도 하였다. 당시 기구를 통한 우편물의 발송을 위해 전용엽서가 발행되었고 편지에는 ‘PAR BALLON MONTE'라는 문구를 찍어 20센트의 우편요금을 받고 우편물을 발송하였다.

정치
일본하늘에 태극기가 휘날리던 그 날

내용시작대한민국의 국기를 '태극기(太極旗)'라고 한다. 1883년(고종 20) 조선의 국기로 채택되고, 1948년부터

대한민국 국기로 사용되고 있다. 최초의 국기가 만들어지고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우리의 국기는 ‘조선국기’로 불려 왔었다. 태극기라는 명칭이 붙게 된 것은 우리의 독립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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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을 물리치기 위하여 '태극기'로 부르자고 약속을 하면서부터 새롭게 퍼지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지며, 1942년 3월 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국기 이름을 공식적으로 '태극기'라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우리의 보물 태극기가 1882년 9월 25일, 인천항을 떠난 수신사 박영효, 서광범, 김옥균 등의 일행에 의해 일본 고베(神戶)의 니시무라야(西村屋) 여관 옥상에 대한민국 태극기가 최초로 게양되었다. 이 태극기는 일본으로 떠나기 전 고종이 직접 지시한대로 흰색 바탕에 태극 문양과 건곤감리(乾坤坎離)의 4괘로 이루어진 것으로 수신사 일행이 일본으로 가는 선박 위에서 직접 제작한 것이었다.

세계반공연맹 총회 개막

내용시작1967년 9월 25일부터 29일까지 5일간 중국 대북(臺北)에서 역사적인 제1차 와클(세계반공연맹)총회가 개최되었다. 이 연맹은 1966년 10월에 서울에서 개최되었던 제12차 아시아 민족반공연맹 회의에서 한국측이 세계적인 반공운동 체제의 확립을 위하여 세계반공연맹의 창설을 제의한 결과, 만장일치로 가결됨으로써 1967년 4월 1일부터 헌장이 발효되어 6월 1일에 상설 사무국을 서울에 두고 정식으로 발족하였던 것이다. 세계반공연맹은 자유와 정의, 인간의 존엄성을 중히 여기며 잔악한 공산 세력을 분

세계반공연맹 1차총회 기념 상세정보보기

쇄하고 공산 치하에서 신음하고 있는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한 성스러운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서로 힘을 합하고 노력을 모아 악랄한 공산만행을 저지, 규탄하고자 발족

되었다. 주요 임무 및 활동사항으로 공산주의 침략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 방법의 강구, 자유국가 국민의 반공투쟁 지원, 공산치하에 있는 국민의 해방운동 지원, 대(對)공

산 정치 심리전 방안의 연구개발, 자유국가 간의 문화 ·정보교류와 상호이해 증진 등이다. 한국은 세계반공연맹 1차총회를 기념하기 위하여 총회 개막당일 기념우표를 발행하였다.

미국 독립혁명의 지도자, 애덤스

내용시작미국의 독립혁명 지도자인 사무엘 애덤스(Samuel Adams, 1722.9.27~1803.10.2)는 미국 매사추세츠주(州) 보스턴에서 출생했다.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한 애덤스는 1764∼1774년 매사추세츠 식민지의회 의원으로 활약하면서 영국정

부의 식민지과세에 대한 반대운동을 지도하면서 미국 독립혁명의 지도자로 급부상하기 시작했으며, 1765년 인지조례(印紙條例)를 반대하는 항의문을 기초(起草)하는 한편, 인간의 자연권(自然權)과 반영(反英)운동 관련 자료들을 제작하

였다. 대륙회의 의장 J.핸콕 등의 후원으로 ‘혁명의 자식’이라는 혁명기관을 조직하고, 통신위원회를 통하여 혁명운동을 추진하였다. 그 후 보스턴차(茶) 사건의 주동자로 매사추세츠 총독의 체포령으로 인해 피신생활을 하였으나 혁명운동

1973년 미국 발행

은 계속되었다. 1774∼1781년 대륙회의 대표로 활약하였다
※ 미국독립혁명(美國獨立戰爭, United States War of Independence): 영국의 식민지였던 북아메리카 13개주가 독립을 이룬 전쟁(1775년~1783년)
※ 보스턴차사건(Boston Tea Party) : 1773년 12월 16일 밤 미국 식민지의 주민들이 영국본국으로부터의 차(茶) 수입을 저지하기 위하여 일으켰던 사건

문화
이집트 아부심벨 신전 이전공사 완료

내용시작1963년 우리나라는 아부심벨 대신전을 도안으로한 3원, 4원권(연쇄)의 기념우표를 발행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연쇄우표이기도 한 이 우표는 누비아 유적을 보호하자는 유네스코의 세계적인 운동에 호응하여 발행된 것이다. 누비아는 나일강 상류의 이집트와 수단 국경 지방의 옛 이름으로 이곳에는 고대 이집트 문명을 웅변하는 많은 유적이 있으며, 이 중에서도 아부심벨 대신전은 가장 웅대하고 이집트 문명의 정화로서 유명한 곳이다. 나일강변의 사암층의 사면을 절개하여 조각한 대 암굴신전으로 3,200

누비아 유적 보호운동 기념 상세정보보기

여년전 이집트 제19왕조 람세스 2세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다. 표면에 조각된 4개의 거대한 좌상은 람세스 2세 자신의 상이며 그 높이가 각각 20여미터에 이르며 굴 안에 있는 신전을 수호하는 뜻에서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고대 이집트 문명의 보고가 이집트의 현대

화를 위한 아스완댐 건설로 인하여 나일강의 흐린 물속에 잠기게 될 운명에 놓여 있었다. 이를 구출하자는 여론이 퍼지자 유네스코는 1960년도 총회에서 아부심벨 대신전의 구제운동을 전 세계적으로 전개하기로 만장일치로 채택하였고 우

리나라도 우표발행 수익의 일부를 유네스코에 기증함으로써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수장 위기에 처한 아부심벨 대신전은 유네스코의 헌신적인 노력과 현대공학의 혜택으로 신전을 원형대로 70m를 끌어올려 영구히 보존하게 되었다.

미국의 대중적인 작곡가, 거슈윈

내용시작미국의 작곡가 거슈윈은 1924년 재즈 피아노 협주곡 “Rhapsody in blue”를 발표해 최고의 명성을 쌓았으며 다수의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비롯하여 고전적인 음악양식과 대중적인 양식을 혼합한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며 미국에서 가장 중요하고 대중적인 작곡가로서 평가받고 있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작곡활동과 극장 전속 피아니스트로서 활동하며 무대에 대한 감각과 대중적인 음악에 대한 열정을 키웠던 거슈인(George Gershwin, 1898.9.26~1937.7.11) 은 1919년 뮤지컬쇼 '신바드'의 삽입곡 '스와니'를 히트시키며 커다란 인기를 얻었다.

1999년 미국 발행

미국의 잃어버린 세대를 대변하는 작가, 피츠제럴드

내용시작"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는 하나의 ‘위대’하고도 기괴한 스펙터클로 현대 미국의 초상을 그려 내었다. 현실을 바라보는 피츠제럴드의 시선은 다른 어느 작품에서보다 깊고 날카로우며 형식미는 완벽에 가깝다" - 뉴욕 타임즈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로 유명한 미국의 단편소설 작가인 F.

스콧 피츠제럴드(Francis Scott Key Fitzgerald, 1896.9.~1940.12.)는 미국 작가, 아니 세계 작가를 통틀어서도 단편 소설을 많이 쓴 작가 중에 하나로 손꼽힌다. 작가로서의 유명세를 떨칠 수 있게 한 작품은 '위대한 개츠비(1925)'나 '밤은 부드러워(1934)'와 같은 장편 소설이지만, 대학 시절에 발표한 작품을

포함하여 그가 생전에 출간한 단편 작품은 모두 160여 편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의 특징은 물질적 풍요와 성공에 대한 야망, 그리고 잃어버린 젊음과 아름다움에 대한 실망과 환멸을 이야기하고, 삶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낭만적인 꿈과 환상을 주요 소재로 삼았다. 피츠제럴드는 미국의 '잃어버린 세

1996년 미국발행

대'를 대변하는 대표적 작가로 자리매김해왔다. 그의 대표작 '위대한 개츠비'가 출간되었을 때 그 많은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도 잃어버린 세대들의 공감을 얻었기 때문으로, '위대한 개츠비'의 배경이 되는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인 일명 ‘재즈시대’라고 불리는 1920년대로 미국은 급격한 산업화와 전쟁의 승리로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얻었지만 전쟁의 참화를 직/간접으로 체험한 젊은이들은 자신의 삶에 환멸을 느끼고 새로운 것을 찾아 프랑스로 떠났다.

낭만주의 회화의 창시자, 제리코

내용시작19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화가로 낭만주의 회화의 창시자로 칭송받는 제리코(Gericault, Theodore, 1791.9.26~1824.1.26)는 프랑스 루앙에서 출생했다. 1808년 파리에서 C.베르네의 문하에 들어갔으나 2년 뒤 P.N.게랭의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아카데믹한 정통에 불만이 있었고 동시대인으로서는 C.I.H.그로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으며, 또 P.P.루벤스에게 매료되었다. 1816년 이탈리아에 가서 고대의 작품과 르네상스의 화가들을 연구하고,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크게 받아 귀국 후 대작 '메두사호(號)의 뗏목(1819)'을 그려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 작품은 젊은 F.V.E.들라크루아를 감격하게 하였고, 들라크루아에 의한 낭만주의 확립의 위대한 도화선이 되었다. 메두사호의

구조된 선원들에게 실정을 듣고 뗏목을 만들게 하는 등 실감을 살린 이 그림은 격렬한 동세(動勢), 강한 명암과 색채효과 등 극적인 정경을 표현한 박진감에 있어 그 때까지의 회화에서는 볼 수 없던 극적 요소로 가득 차 있다. 1820년 영국으로 건너간 후 영국의 풍경을 수많은 석판화로 묘사하고 또 말을 좋아하고 빨리 달리는 동물의 속도를 좋아하여 그 동작을 예리하게 묘사하였다. 작품으로서는 유화는 얼마 되지 않으나 그리스독립전쟁 및 노예제도 반대 등 시국적인 것을 주제로 한 소묘에 뛰어났고 석판화를 참다운 예술품으로 끌어올린 공로자이기도 하다. 낭만주의 미술의 전개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친 제리코는 멋쟁이 신사에다 열광적인 승마사였으며 그의 회화는 화려하고

정력적이며 다소 병적인 그의 개성을 반영하고 있다.
1974년 알바니아 발행

과학
영국 물리화학자, 패러데이 출생

내용시작1791년 런던근교에서 가난한 대장장이 집안의 3번째 아들로 태어난 패러데이는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초등학교 밖에 졸업하지 못하고, 13세 때 부터 제본 공장의 견습공으로 일하기 시작하였다.
1991년 영국 발행

제본소에서 일하며 다양한 책을 만난 패러데이는 특히 과학서적에 흥미를 가졌다. 평소 자신이 읽던 책의 내용 중 흥미 있는 부분을 꼼꼼하게 노트하는 습관을 가졌던 그는 어느날 그의 노트를 본 한 손님에 의해 평생 그가 갈 길을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를 맞이하였다. 패러데이의 노트에 감명 받은 그 손님은 영국 왕립연구소에서 열리는 과학강연의 입장권을 양보하여 주었고 페러데이는 당대의 위대한 학자이자 훗날 그의 스승이 되는 데이비경의 강연을 듣게 된 것이다. 그 한 번의 강연에 푹 빠져버린 패러데이는 과학자로서의 길을 꿈꾸게 되었고 곧 데이비경에게 도움의 편지를 보내 결국 과학실험의 조수로 고용되기에 이르렀다. 과학실험실의 조수로서 본격적인 화학공부를 시작하게 된 패러데이는 열정적으로 혼

신의 힘을 다하여 매달렸다. 그 결과 염소의 액화(1823년), 벤젠(1825년), 금 콜로이드(1857년)등을 차례차례로 발견하였고 더 나아가 1831년에는 전자 유도 현상을 발견하였으며 1883년에는 전기화학의 기초를 만든 전기분해의 법칙을 발견하는 등 초인적인 과학자로서 활약하였다. 위대한 화학자였던 그의 스승 데이비조차 ‘나의 최대의 발견은 패러데이이다’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로 다방면에 걸친 뛰어난 연구업적과 성과는 19세기 최고의 과학자로서 평가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스승 데이비의 뒤를 이어 영국왕립 실험소장을 역임한 패러데이는 1857년에 왕립 학회 회장에 추천되었으나 평소 세속의 영달을 좋아하지 않았던 그는 사양하였고 1867년 자택 의자에 기댄 채로 잠을 자듯이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춘천 수력발전소 착공

내용시작 한국전력회사가 시공하는 춘천 수력발전소 기공식이 1961년 오늘 열렸다. 국토건설사업의 일환으로 총 공사비 22억8천4백만 원을 투입하는 국가적 사업이다. 이에 따라 국토건설사업비에서 건설비용을 보조 받고 육군 공병대가 도로와 교량공사를 돕기로 했다. 공사 도중인 1964년 대홍수가 나 공정에 차질을 빚기도 하지만 이듬해인 1965년 2월 완성돼 연간 1억4천5백만kW의 전력을 생산하게 된다.

2005년 강원 우표전시회 기념엽서

금주의 노벨상

노벨생리의학상 프랑스의 미생물학자 니콜

1989년 감비아 발행내용시작 파리 근교 루앙에서 태어나 자란 니콜은 루앙의 의학교와 파리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였다. 1892년에 파리의 파스퇴르 연구소에 들어간 니콜(Charles Jules Henri Nicolle, 1866.9.21~1936)은 1893년에 의학 학위를 취득함과 동시에 루앙의 의학교의 세균학 교수로 1902년까지 재직하였다. 1896년부터 세균학연구소의 소장으로 재직 중이던 니콜은 1903년 당시의 프랑스 식민지 튀니지의 파스퇴르 연구소 소장으로 파견되어 열대병과 발진티푸스 대한 연구를 하게 되었다. 니콜은 당시 튀니지에서 발진티푸스 창궐하여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는 현장에 있었고 이를 시급히 해결하기위한 수단을 찾고 있었다. 전염성이 매우강한 이 질병은 당시로서는 전염원인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었으나 감염된 환자가 일단 위생상태가 좋은 병원에 입원하면 더 이상 감염되지 않는 특징이 있었다. 이 특성에 착안한 니콜은 병원과 병원 밖의 환경요인을 분석하였고 그 결과 환자가 입고 있는 의복에서 문제를 찾아내게 되었다. 즉 위생상태가 좋지 않은 생활환경에서 주거하는 사람들의 의복에 기생하는 ‘이’를 매개로 발진티푸스가 감염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그의 발견으로 말미암아 곧 수립된 예방대책에 의해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으며 특히 제1차 세계대전 중 발진티푸스의 예방에 크게 공헌하였다. 1928년 그는 발진티푸스에 대한 연구업적으로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하였다

노벨생리의학상 미국 동물학자겸 유전학자 모건

1989년 스웨덴 발행내용시작 가난한 소작인의 아들 실란페(Frans Eemil Sillanpaa, 1888.9.16~1964.6.3)는 핀란드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는 영예를 얻었다. 헬싱키대학교에서 자연과학을 배우다가 문학으로 뜻을 바꾸어 귀향한 후, 1916년 S.M.살로메키와 결혼하고, 그해 처녀작 '인생과 태양, Elama ja aurinko'을 발표하여 주목을 받았다. 핀란드 독립선언에 잇달아 일어난 내란에서 취재한 '경건한 고뇌, Hurskas kurjuus(1919)'로 지위를 굳혔으며, 다시 '요절(夭折), Nuorena nukkunut(1931)'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 소설은 시골 고가(故家)의 병약한 소녀 시리아가 슬픈 운명을 감수한다는 줄거리로, 자연과 심리를 목가적으로 융합함으로써 핀란드 문학의 독자적인 낭만적 사실주의에 청징(淸澄)한 효과를 더하였다. 1945년 발표한 그의 마지막 작품 '인간의 미와 비참'은 그의 특성을 집대성한 종합적 작품으로 평가된다. 핀란드인 다운 자연관조와 사실주의, 신비주의의 합체(合體)라는 관점에서 국민적 작가의 대표자이며 또 동시에 M.발타리(Mika (Toimi) Waltari, 1908.9.19~1979.8.26)와 더불어 국제적인 작가로 유명하다.

노벨생리의학상 스페인의 생화학자 오초아

1994년 스페인 발행내용시작 DNA의 합성 구조를 발견하여 A.콘버그와 함께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스페인의 생화학자 오초아(Severo Ochoa, 1905.9.24~1993.11.1)는 글래슬로·베를린·런던·마드리드대학교에서 공부했고, 1929년 마드리드대학교에서 의사 자격을 취득했다. 1930~31년 하이델베르크대학교의 O. 마이어호프 밑에서 근육의 생화학과 생리학을 연구했다. 또한 그는 마드리드대학교의 의학연구소에서 생리학 분과 과장으로도 재직했으며, 1938~41년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신체 내의 티아민(비타민 B1)의 기능을 연구했고 1942년 뉴욕대학교의 의학 전임연구원이 되었으며, 1946년 약리학교수, 생화학교수 겸 생화학과 학과장으로 역임하였으며 1974년부터는 로슈 분자생물학연구소에서 연구했다. 세균에서 리보핵산(ribonucleic acid/RNA)의 합성에 관여하는 효소를 발견으로 인하여 그의 제자인 A. 콘버그와 함께 1959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그가 폴리뉴클레오티드 포스포릴라아제로 명명한 이 효소는 유전자에 있는 유전정보들이 매개체인 RNA를 거쳐 각 세포의 기능과 형질을 결정하는 효소로 번역되는 과정을 과학자들이 이해할 수 있게 한 점에서 특히 가치가 있다

노벨생리의학상 러시아의 생화학자 파블로프

1969년 러시아 발행내용시작 소화기관의 소화액 분비에 관한 연구로 1904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하였으며 동물의 조건반사에 관한 연구로도 유명하다. 1879년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 의학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독일 유학과 육군 군의학교에서 활발한 연구 활동을 하였다. 1891년부터 실험의학연구소에서 본격적인 소화샘의 연구를 통해 소화액 분비메커니즘을 밝혀냈으며 이와 더불어 신경지배에 관한 연구로 많은 명성을 쌓았다. 뛰어난 외과의사이기도 하였던 파블로프(Ivan Petrovich Pavlov, 1849~1936)는 다양하고 새로운 실험법을 창안해 자연과학의 방법으로 정상적이고 건강한 동물을 연구하는 길을 열었으며 행동의 과학적 분석에 기초를 다지는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노벨생리의학상 네덜란드의 물리학자 카메를링 오네스

내용시작 프로닝겐 출생의 오네스(1853.9.21 ~ 1926.2.21)는 수학·물리학을 배우고,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서 G.R.키르히호프와 R.W.분젠의 지도를 받았다. 1882년 레이덴대학교 교수(1882∼1923)가 되었다. 반 데르 발스의 업적에 자극을 받아, 기체 및 액체의 상태방정식(카메를링오네스의 상태방정식)을 연구하여 온도와 압력을 광범위하게 측정하였다. 1894년 레이덴대학교에 저온연구소(低溫硏究所)를 부설, 1904년에 액체공기를, 1906년에는 액체수소를 제조하였다. 1908년 처음으로 헬륨의 액화(液化)에 성공하여 절대영도에 가까운 -269 ℃의 극저온을 얻어냈다. 이후 계속 저온영역에서의 물질의 성질을 조사하여, 금속의 저온에 있어서의 초전도현상(超傳導現象)을 발견, 극저온물리학을 개척하였다. 이러한 업적으로 1913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온라인미술관
체코 태생, 프랑스 화가 쿠프카
1968년 체코 발행

내용시작1871년 보헤미아 지방의 오포슈노에서 태어난 쿠프카는 간판을 그리는 페인트공으로 일하면서 미술공부를 시작하여 프라하와 빈 아카데미를 거쳐 파리 국립미술학교에서 정식 미술공부를 하였다. 프랑스의 화가 조르주 쇠라에게서 영감을 얻어 시작한 입체파 양식에 대한 다양한 쿠프카의 연구는 그의 원숙기 작품에서 보여주는 색채의 미학적 특성과 더불어 곡선으로 이루어진 순수 추상화를 남기는 기초가 되었다. 1911년 이후 완전한 비구상작품들을 남긴 쿠프카는 순수 추상화를 제창한 최초의 대표적 인물로서 또한 ‘오르피슴’(시인이자 미술 평론가인 기욤 아폴리네르가 1912년 입체파인 들로네의 실험적 작품을 ‘큐비즘 올피크’라고 한 데서 비롯된 20세기 초반에 일어난 회화운동)의 대표적인 화가로서 색채 그 자체만으로 인간에게 음악의 선율 같은 심오한 정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대표적인 프랑스 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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